항목 ID | GC070003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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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院寺木造三世佛坐像 |
영어공식명칭 | Wooden Seated Buddhas of Three Ages of Daewonsa Temple |
분야 | 문화유산/유형 유산,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물/불상 |
지역 |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모악산길 243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진정환 |
[정의]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원기리에 위치한 대원사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는 17세기 후반 목조삼세불좌상.
[개설]
석가여래를 본존으로 한 아미타여래, 약사여래로 구성된 삼세불로, 완주군 모악산 대원사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다. 2008년 8월 1일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15호로 지정되었으며,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전라북도 유형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삼세불은 과거, 현재, 미래를 상징하는 세 불상을 함께 일컫는 것으로, 시기마다 그 구성이 달라지는데, 대원사 불상이 조성된 조선 후기의 삼세불은 대체로 석가여래·아미타여래·약사여래로 구성되었다.
[형태]
목조석가여래좌상은 높이 127㎝, 무릎 너비가 91.0㎝이다. 불상은 상체를 약간 앞으로 내민 구부정한 자세이다. 머리에는 뾰족한 나발과 경계가 불분명한 육계[부처의 머리 위에 살이나 혹, 머리뼈가 솟은 것으로 지혜를 상징]가 표현되어 있고, 이마 위에는 반원형 중앙계주가 있다. 방형의 얼굴에 코는 원통형으로 단순하며, 목에는 삼도가 표현되어 있다. 오른손은 무릎 밑으로 내린 항마촉지인으로 왼손을 무릎 위에 자연스럽게 올려놓고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다. 그런데 엄지와 중지 사이에는 작은 구슬이 있으며, 이는 다른 2구의 불상에서도 마찬가지로 확인된다. 대의[설법하거나 걸식을 할 때 입는 승려의 옷]는 오른쪽 어깨에서 내려와 완만한 U자형을 이루고 있으나, 반면 약사여래는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 나머지 자락은 두 겹으로 접혀 오른쪽 어깨에 걸친 후 팔꿈치와 배를 지나 왼쪽 어깨로 넘겼다. 하반신을 덮은 대의 자락은 배에서부터 완만하게 늘어져 있다. 약사여래와 아미타여래는 본존에 비해 크기가 조금 작을 뿐 머리와 얼굴의 형태, 신체의 표현 방식, 착의법 등이 거의 유사하다. 다만 좌협시인 약사여래는 오른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왼손을 가슴까지 들어 역시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다. 우협시인 아미타여래는 이와 반대이다.
[특징]
대원사에는 대웅전 소장 조성 발원문이 남아 있는데, 조성 연대와 연화질[화사와 시주자 등의 이름을 써넣는 것] 등은 없고, 시주자 313명만 언급되어 있다. 그 가운데 쌍옥이라는 스님만이 1688년(숙종 14)에 조성된 명부전 불상에 참여하고 있다. 다만 여기에 참여한 여러 승려는 17세기 중후반 전주와 완주 일대 사찰의 불상 조성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아울러 수종과 연륜 분석을 통해 17세기 후반에 벌채한 목재가 사용되었음을 확인하였다. 대원사 목조삼세불은 신체에 비해 머리가 큰 편이고, 상반신에 비해 하반신이 높아, 1650년대 이전에 조성된 불상의 신체비례와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이렇게 상반신에 비해 하반신이 높아지는 경향은 17세기 후반에 보이는 양상이다. 한편 대원사 불상의 얼굴은 제작 시기를 알 수 없는 충청남도 공주 신원사 극락전과 명부전의 불상과 유사하나, 17세기 후반 호남 지역에서 활동하였던 색난이나 충옥의 불상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대의 자락에서도 다양한 조각승들의 경향을 살펴볼 수 있다. 반면 오른쪽 끝단이 대각선으로 왼쪽 안으로 접히면서 상단이 완만하게 처리된 승각기[불상의 드러난 가슴을 가리는 속옷]의 표현은 조각승 회감과 그 계보에 속하는 조각승들이 만든 불상에서 살펴볼 수 있는 특징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대원사목조삼세불좌상은 17세기 후반 조각승 회감 또는 그의 계보에 속하는 조각승이 조성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의의와 평가]
대원사목조삼세불좌상은 비록 조성 시기와 조각승을 알려주는 기록은 없지만, 당대 불상과의 비교, 시주자의 활약 등의 검토를 통해 17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대원사목조삼세불좌상은 대원사 명부전 불상, 동종 등과 함께 당시 모악산 일대를 중심으로 한 불교 재건 운동의 일면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