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0004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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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完州威鳳山城 |
영어공식명칭 | Wibongsanseong Fortress, Wanju |
분야 | 문화유산/유형 유산,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1-32 일원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강원종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05년 - 완주 위봉산성 서문지 일대 발굴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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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06년 4월 6일 - 완주 위봉산성 사적 제471호로 지정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15년 - 완주 위봉산성 성곽복원 정비사업부지 내 수구지 발굴조사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17년 - 완주 위봉산성 행궁지 매장문화재 발굴조사 |
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완주 위봉산성 사적으로 재지정 |
현 소재지 | 완주 위봉산성 -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1-32 일원 |
원소재지 | 완주 위봉산성 -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1-32 일원 |
성격 | 산성 |
양식 | 포곡식(包谷式) |
크기(높이,길이,둘레) | 8.6㎞[둘레] |
면적 | 1,736,835㎡ |
관리자 | 완주군 |
문화재 지정 번호 | 사적 |
[정의]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에 있는 조선시대 산성.
[개설]
완주 위봉산성은 조선 후기에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어진(御眞)을 모시기 위해 돌로 쌓은 산성으로 2006년 4월 6일 사적 제471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사적으로 재지정되었다.
[건립 경위]
1675년(숙종 원년)부터 1682년(숙종 8)까지 변란(變亂)에 대비하여 주민들을 입보(入保)[성안에 들어가 보호를 받음]시키고,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시기 위해 산성을 축조하였다. 완주 위봉산성 안에는 어진을 모시기 위한 행궁을 두었다. 1808년(순조 8)에 관찰사 이상황(李相璜)이 중수(重修)하였다. 유사(有事)시에 전주 경기전(慶基殿)에 있는 태조의 영정(影幀)과 시조(始祖)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한 것으로 동학농민운동 때 전주부성(全州府城)이 동학군에 의해 함락되자 태조의 영정과 시조의 위패를 피난시킨 일이 있었다.
[위치]
완주군 소양면 소재지에서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인 송광사(松廣寺)로 간 후 동상면 수만리 방면 도로를 따라 4㎞ 정도 오르면 완주 위봉산성 서문지(西門址)가 도로변에 보인다. 완주 위봉산성은 서문지로부터 산세(山勢)를 따라 동서 방향으로 이어지다가 북쪽으로 꺾인다. 완주 위봉산성 내부에는 위봉마을이 형성되어 있으며, 마을 서쪽에는 위봉사가 있다.
[형태]
완주 위봉산성은 포곡식(包谷式)으로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축조되었고, 평면 형태는 대체로 남북으로 긴 장방형(長方形) 모양을 하고 있다. 산성의 둘레는 약 8.6㎞에 달하는 대규모 석성(石城)이다.
[현황]
완주 위봉산성에는 성문지(城門址) 4개소, 암문지(暗門址)[성에서 구석지고 드나들기 편리한 곳에 적 또는 상대편이 알 수 없게 꾸민 작은 성문이 있던 터] 6개소, 장대지(將臺址)[전쟁 시 군사 지휘가 쉬운 곳에 지은 장군의 지휘소가 있던 터] 2개소, 포루지(砲樓址)[포진지 터] 13개소, 수구지(水口址)[물을 끌어들이거나 흘려 내보내는 터] 1개소 등이 확인되고 있으며, 일부 성벽을 제외하고는 성벽 및 성문, 포루, 여장(女墻)[담], 총안(銃眼), 암문 등이 일부 남아 있다. 성문 중 전주시로 통하는 서문지가 조사되었는데, 문 위에 3칸의 문루(門樓)가 있었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고 높이 3m, 너비 3m의 홍예형(虹蜺形) 석문(石門)만 남아 있다. 서문지 밖의 옹성(甕城)은 언제 쌓았는지 알 수 없는데, 『해동지도(海東地圖)』, 『여지도서(餘地圖書)』, 『완산지(完山誌)』 등의 고지도(古地圖)에는 성문의 형태와 문루가 남아 있고, 옹성은 보이지 않은 점으로 보아 근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성벽의 축조는 대형석재를 기단석(基壇石)으로 하고 그 위에 크고 작은 석재를 막 쌓으면서 위로 올라갈수록 점차 물러나며 쌓았다. 최근 서문지 주변의 성벽이 일부 복원되어 있다. 수구지는 서문지에서 서쪽으로 100m 지점에서 조사되었다. 성 안쪽의 작은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우수(雨水)를 성 밖으로 내보내기 위한 시설로 성벽 내부에 지하 배수로를 만들었다. 수구시설은 레일처럼 양쪽에 돌을 세우고 그 위에 덮개돌을 덮은 형태로 약간의 경사와 계단을 두어 물이 성 밖으로 흘러나가도록 하였다. 수구 시설의 길이는 1,160㎝로 다른 부분의 성벽보다 폭을 두텁게 만든다.
완주 위봉산성 내부에는 추정 건물지(推定 建物址) 15개소를 비롯하여 행궁지(行宮址), 위봉사(威鳳寺), 진장청사(鎭將廳司), 연무정(鍊武亭), 군기고(軍器庫), 우물지[井址] 등이 남아 있다. 2017년에 조사된 행궁지에서는 「위봉진사례(威鳳鎭事例)」에 기록된 진전(眞殿)[왕의 초상화인 어진을 봉안하고 제사 지내던 곳], 익랑(翼廊)[대문의 좌우 양편에 잇대어 지은 행랑], 내신문(內神門), 외신문(外神門)의 자리가 확인되어 행궁의 정비 및 복원의 기초자료를 제공하였다.
[의의와 평가]
완주 위봉산성은 지리 및 지형적으로 험준하고 인적이 닿기 어려운 곳에 축성되었다. 완주 위봉산성은 지역 및 경계 방어를 위한 군사적인 목적보다는 행궁을 지어 유사시 태조 이성계의 영정과 위패를 모시기 위해 축성된 조선시대 행성(行城)이라는 점에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