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0006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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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具瑩 |
영어공식명칭 | Gu Yeong |
이칭/별칭 | 영연(塋然),죽유 |
분야 | 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면 삼기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선아 |
출생 시기/일시 | 1584년(선조 17) - 구영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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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12년(광해군 4) - 구영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진사(進士)가 됨 |
활동 시기/일시 | 1626년(인조 4) - 구영 활인서별제(活仁署別提)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28년(인조 6) - 구영 사도시직장(司導寺直長)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630년(인조 8) - 구영 부사과(副司果)가 됨 |
활동 시기/일시 | 1638년(인조 16) - 구영 와서별제(瓦署別提) 위임 |
활동 시기/일시 | 1639년(인조 17) - 구영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
활동 시기/일시 | 1641년(인조 19) - 구영 회인현감(懷仁縣監) |
몰년 시기/일시 | 1663년(현종 4) - 구영 사망 |
출생지 | 구영 출생지 - 전라북도 완주군 |
사당|배향지 | 구영 배향지 -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면 삼기리 백현사(栢峴祠) |
성격 | 학자 |
성별 | 남자 |
본관 | 능성(綾城) |
[정의]
조선 후기 전라북도 완주군 출신의 학자.
[가계]
구영(具塋)[1584~1663]의 본관은 능성(綾城)이고, 자(字)는 영연(塋然), 호(號)는 죽유이다. 고려의 상장군 구존유(具存裕)의 후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사직을 지낸 구세영(具世英), 할아버지는 구담(具曇), 아버지는 구대윤(具大倫)이며 어머니는 영천이씨 이수윤(李守胤)의 증손녀이다.
[활동 사항]
구영은 김장생의 문하에 수학하였으며 1612년(광해군 4)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었다. 1618년(광해군 10년)에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廢)하자는 논의가 대두되자, 전주(全州)에 살던 유응원(柳應元)이라는 사람이 글을 지어 이를 지지하고 나섰다. 이 소식을 들은 구영은 유생들을 모아 향교(鄕校)에 들어가 이에 반대하는 글을 지어서 인목대비를 폐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규탄하였으며 인목대비 폐모론에 동조하는 통문을 불살랐다고 한다. 1626년(인조 4) 유일(遺逸)로 활인서별제(活仁署別提)에 제수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이 발발하였을 때 인조가 강화도로 피난하고자 하였는데, 유태형(柳泰亨)과 함께 호남으로 피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소현세자가 분조하여 남행할 때 체찰사 이원익과 함께 보좌하였다. 이때 공(功)으로 1628년에 영사공신(寧社功臣)과 소무공신(昭武功臣) 각 1등을 내렸다. 1628년에 사도시직장(司導寺直長)에 임명되었고, 1630년에 부사과(副司果)가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구영은 의병장 정홍명(鄭弘溟)[1592~1650]의 막하에 들어갔다. 정홍명은 정철(鄭澈)의 아들로서 김장생의 제자였다. 구영은 정홍명의 막하에서 군무에 힘쓰면서도 항상 위기에 처한 국가의 앞날을 생각하고 눈물을 흘리며 걱정했다고 한다. 1638년에 와서별제(瓦署別提)에 위임되고, 1639년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거쳐 1641년 회인현감(懷仁縣監)이 되었다. 1643년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 돌아와 후진 교육으로 일생을 마쳤다.
[학문과 저술]
구영의 저서로는 문집 『죽유시집』 인쇄본 2권 1책이 있다. 부록에 송시열(宋時烈)의 서문(序文)과 묘갈(墓碣)이 있고, 송준길(宋浚吉)이 쓴 행장(行狀)이 실렸다.
[상훈과 추모]
구영은 완주군 고산면 삼기리에 있는 백현사(栢峴祠)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