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0007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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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柳炫錫 |
영어공식명칭 | Yu Hyeon-seok |
이칭/별칭 | 배근,월산 |
분야 | 성씨·인물/근현대 인물,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북도 완주군 비봉면 내월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임혜영 |
출생 시기/일시 | 1888년(고종 25) - 유현석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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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6년 - 유현석 투옥 12년형 |
몰년 시기/일시 | 1960년 - 유현석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83년 - 유현석 대통령 표창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유현석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출생지 | 유현석 출생지 - 전라북도 완주군 비봉면 내월리 |
성격 | 의병 |
성별 | 남자 |
본관 | 고흥(高興) |
[정의]
개항기 전라북도 완주군 출신의 의병.
[개설]
유현석(柳炫錫)[1888~1960]은 을사늑약 체결 이후 일본이 노골적으로 식민지화를 추진하자 1906년 10월 유씨 집안 9명과 거의(擧義)하고 군자금 모금에 주력했다. 의병 해산 후에는 고향에서 은거생활을 했는데 1916년 일본 경찰에게 의병 활동이 탐지되어 체포되었다. 유현석은 12년형을 선고받고 전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가계]
유현석의 자는 배근이고 호는 월산, 본관은 고흥(高興)이다. 월곡처사 유종흥(柳宗興)의 7대손이다.
[활동 사항]
유현석은 1905년 일본의 강압에 의해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유현석은 일제의 야욕을 적극 분쇄할 방안을 모색했다. 1906년 10월경 유현석은 유명석(柳命錫), 유준석(柳俊石) 등 유씨 일문 9명과 거의할 것을 모의하고, 1907년 10월경에는 익산 일대에서 군자금 모금을 시작했다. 모금을 시작한 10월과 이듬해 5월 두 차례에 걸쳐 익산의 대지주인 이봉승에게서 모금하고 10월에는 익산군 여산면 원수리 노상에서, 또 한흥수에게서도 모금했다. 그 후 의병이 해산되어 고향에 돌아가 은거 생활을 했는데, 그 후 10년이 지난 1916년 이 사실이 일본 경찰에게 탐지되어 체포되었다. 그러나 이 조목은 한일합방 때의 대사령으로 적용이 되지 않으므로 그 당시에 저지른 강도죄로 날조되어 죄를 뒤집어썼다. 그리하여 12년형의 선고를 받고 전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유현석은 1983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