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동 난장과 봉동 오른씨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001372
한자 鳳東亂場-鳳東-
영어공식명칭 Bongdong Nanjang and Bongdong Oreun Ssireum (Dangsan Ritual and Korean wrestiling)
분야 문화·교육/체육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북도 완주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정경회

[정의]

전라북도 완주군 봉동읍민의 날에 상장기공원에서 올리는 당산제와 더불어 개최되는 봉동 오른씨름.

[봉동난장]

우리나라 각 지역에는 5일장 혹은 7일장이라 하여 일정 간격으로 매월 정기적으로 장이 열렸다. 이러한 장은 해가 질 무렵까지 하루 동안만 열린다. 그러나 특수지역이나 특수 수산물이 일시에 다량으로 생산되는 지방에서는 난장이라는 장이 열리는 수가 있다. 난장이란 정기적 장이 아닌 특수한 장이라는 뜻으로, 하루만 열리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10일간, 길게는 2개월까지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열리게 되는 것이 상례다. 지방의 경기 부양과 번영을 도모하기 위해 열리는 수도 있다. 지방의 난장은 크지 않아도 매년 연다. 난장을 열어 수많은 사람이 모여들어 떠들썩하고 지역의 특산물과 생산품 등이 대량으로 거래되어 엄청난 돈이 유통되었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고 많은 돈의 유통으로 부작용도 나타났다. 연예인, 복술쟁이, 투기꾼, 도박꾼, 건달패, 싸움패, 요식업자, 창녀 등과 난장 굿을 벌이는 무당도 모여들어 소비를 조장하고 유흥적 낭비를 유발했다. 난장에는 각지에서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자기의 이익 추구에만 전념하였기에 질서 있는 지연적 유대성은 깨지고 사회규범이 파괴되어 비속하고 파렴치한 언행이 난무했으며, 노름, 싸움, 폭행, 사기 등이 흔하게 행해졌다.

전라북도 완주군의 봉동난장에 얽힌 설화에 따르면, 옛날 고산천 근방의 숲에 도깨비들이 우글거리며 장난을 쳐 하천이 자주 범람하고 둑이 터졌다. 그래서 도깨비들의 기를 꺾기 위해 난장을 열어서 판을 누르고 씨름판을 벌여 사람들의 힘을 과시한 데에서 유래되었다 한다. 난장은 농한기인 음력 7월 20일경에 매년 개장되었는데 경비는 이곳의 상인들과 지방 유지들이 부담하였다. 전라북도 완주군 봉동읍 장기리의 예전 사장터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난장이 시작되면, 씨름판 및 각종 놀이판이 벌어지고 시전과 음식점·술집 등이 개설되어 5~10일 동안 성황을 이룬다. 이 행사는 1960년까지 존속되었다.

[봉동 당산제]

동제(洞祭)[마을 공동제]에는 당산제와 기우제 등이 있다. 당산제는 동신제(洞神祭).산신제(山神祭) 등 여러 가지 호칭이 있으며 그 대상은 당산수, 산제당, 산제단, 누석단, 짐대, 장승 등이 있어 이에 제사를 지낸다. 기우제는 마을 근처의 높은 산 정상에서 행한다. 당산제는 마을 수호신에게 치성을 드리는 것이며 기우제는 비를 내려달라는 기원에서 하느님께 치성을 드린 것인데 궁극에는 모두 하느님께 귀일된 것이다. 봉동 당산제는 300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전라북도 완주군 봉동읍 상장기공원에는 노거수들이 우거져 있고 16개의 선정비가 세워져 있다. 16개의 선정비에는 제방이 무너지지 않도록 잘 보수하여 물난리를 면하게 해주었거나 물난리 중에 많은 사람을 구제한 것을 감사하는 내용이 있다. 노거수는 수령 200년 이상의 커다란 나무를 말하며 상장기공원의 노거수는 느티나무와 팽나무로 총 8그루가 있다. 이 중 앞에 ‘봉동 당산제단’이라고 쓰인 제단이 있는 느티나무가 마을의 수호신인 당산신을 모신 당산나무로 음력 7월 20일 이곳에서 당산제를 올린다. 원래 봉동 당산제단은 옛 고산현의 처형장이 있던 곳으로 억울하게 죽은 원혼을 달래고 홍수로 마을이 피해를 보지 않도록 기원하기 위해 당산제를 지내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다른 지역의 당산제와 달리 초저녁에 제사를 지내고 다리 아래 강가에서 횃불을 두르고 씨름을 하였다. 지금도 당산제는 전승되고 있으며 당산제를 올렸던 음력 7월 10일은 봉동읍면민의 날로 정해져 당산제와 씨름이 진행되고 있다. ‘봉동읍면민의 날’이 되면 낮에는 봉동초등학교에서 동네별로 민속행사 및 체육대회로 한바탕 놀이가 진행된다. 저녁이 되면 상장기 마을 주도하에 병풍을 치고 돼지머리와 과일을 차려 놓고 죽은 영혼들에 올리는 제를 지낸다. 당산제가 치러지면 마을 농악패들이 풍장을 치며 봉신교 아래로 내려가며 이곳에서 씨름이 이루어진다.

[봉동 씨름]

한국의 씨름은 두 사람이 샅바를 맨 상태에서 상대방을 넘어뜨리는 우리나라 고유의 민속경기이자 놀이다. 씨름의 역사는 고구려 씨름 무덤[각서총]과 장천1호분의 벽화에 나타날 정도로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다. 씨름은 서로 버티고 힘을 겨룬다는 ‘씨룬다’라는 말에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 현대 스포츠에서 씨름 경기는 왼씨름인 데 반하여 봉동씨름은 오른씨름으로 경기가 진행되었다. 씨름은 전통적인 스포츠이며, 씨름의 형태와 유사한 일본의 스모, 몽골의 부흐, 러시아의 삼보, 스페인의 루차키나리아 등이 존재하고 있다. 씨름은 우리나라에서 개최되는 난장, 체육대회, 지역의 행사 등에 빠짐없이 개최되며 많은 사람의 관심과 사랑을 받아왔다. 전통 씨름이 전국대회로서 성장하게 된 배경에는 서울고등보통학교에서 체육 교사로 근무했던 강낙원 교사 등이 주축이 되어 1927년 9월 서울 휘문보통학교에서 제1회 ‘전조선씨름대회’가 열리고 1936년 조선일보가 주최한 ‘전조선씨름선수권대회’가 개최되었다. 광복 후 1948년 제29회 전국체육대회 때 처음으로 경기종목에 씨름이 채택되었다. 당시 씨름은 오른씨름과 왼씨름이 따로 있었다. 왼씨름은 오른손으로 허리띠를 잡는 데 견주어 오른씨름은 왼손으로 허리띠를 잡는 방법이다. 왼씨름은 왼손잡이에게 유리한 씨름방법이다. 호남 지방에서 유행해 온 오른씨름은 힘이 약한 왼손은 허리띠를 잡고 힘이 센 오른손으로 샅바를 잡기도 하고 잡지 않고 손기술을 발휘할 수도 있어 오른손잡이가 유리하다. 현재 경기는 왼씨름으로 통일되어 있는데 이는 경상도 지역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던 방식이고, 오른씨름은 호남 지역을 중심으로 진행되었으나 현재는 오른씨름 경기가 없는 실정으로 전통적인 경기가 사라지고 있다는 아쉬움이 있다.

봉동씨름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지역의 80~90대 어르신들은 이구동성으로 자신이 태어나기 전부터 봉동씨름이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 훨씬 이전부터라고 말하는 원로들의 증언대로만 해도 봉동씨름의 역사는 2백 년 이상으로 추정된다. 봉동씨름이 이처럼 오랜 전통 아래 발전해온 것은 봉동 특유의 환경적 요인이 작용한 것으로 짐작해볼 수 있다.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면 삼기리에서 대아 쪽 물과 경천물이 합수한 고산천은 봉동에 이르면서 큰 강을 이룬다. 이 때문에 여름철이 되면 봉동천은 으레 큰물이 져 한두 번은 반드시 물난리를 치렀다. 주민들이 모두 나서 제방을 쌓을 수밖에 없었다. 장마철인 음력 7월 20일께는 모두들 나와 천변에서 순번을 서며 제방을 지켰다. 무턱대고 지키느니 재미를 붙이자면서 씨름을 즐겼다. 또 씨름을 안 하면 제방이 터진다는 속설에 장정들이 웃통을 벗고 씨름을 했다는 설도 있다. 봉동천 범람을 우려해 방천 터에서 씨름을 하게 되었다는 주민들의 전해 내려오는 내용이 있다. 1918년 당시 지도에 의하면 고산천 제방 공사는 진행되지 않고 1924년부터 시작하여 1938년까지 완공되었다는 곳을 보면 씨름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멍에방천과 관련이 있다고 보인다. 멍에방천은 고산천의 물길이 봉동읍 장기리 입구에서 물길이 꺾어지는 지점으로 그 모양이 소의 멍에 모양과 닮아 지역주민들이 부르는 지명인데 고산천의 물길이 바뀌면서 엄청난 수력의 힘으로 방천에 정면으로 부딪히면서 이 둑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둑을 감시하고 둑을 다지는 역할을 하기 위해 씨름을 하였다는 것이 봉동씨름 연원에 대한 첫 번째 속설이다.

두 번째는 제전의식으로서의 씨름이다. 전라북도 완주군 봉동읍 장기리는 옛날 사형터였다. 그래서 억울하게 죽은 원혼들을 달래주자며 당산나무 아래에서 당산제를 지내고 씨름을 했다는 설이다. 이와 비슷한 내용으로 옛 고산현이 사형터여서 죽은 원귀를 달래는 의식으로 씨름이 형성되었다는 설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고산천의 수해로 인명 피해가 커 물귀신을 달래기 위해서 생겼다는 이야기도 있다. 세 번째는 전라북도 완주군 봉동읍의 기가 너무 세서 터를 달래기 위해 봉동의 청년들이 씨름을 했다는 설이다. 이 세 가지 설에 대해 주민들은 대체로 긍정하고 있다. 그러면서 봉동이 천변에 맞닿아 자연스럽게 씨름을 상시 즐겼기 때문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봉동에 가서 힘자랑하지 마라”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봉동씨름은 지역민뿐만 아니라 타지에서도 그 유명세가 잘 알려져 있다. 봉동씨름이 완주를 대표하는 민속놀이 자리 잡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봉동씨름의 경기방식은 주로 맞붙기[Tournament]와 돌려 붙기[League match] 방식으로 진행된다. 경기는 상씨름, 중씨름, 애기씨름으로 각각 체급을 나눴으나 상씨름이 중심을 이뤘다. 경기 방식은 더 대적할 만한 사람이 없을 때까지 싸우는 이른바 “지워내기”였다. 우승 상품으로는 송아지를 걸어 놓고 소걸이 씨름을 했으며 때로는 동네마다 풍물을 치며 응원하는 각 마을대항전도 있었다. 큰 대회는 무조건 상씨름이었는데 둘이 맞붙어서 하나가 지면 다시 나가 싸우고 열 명, 스무 명이 밤새도록 싸웠다. 마지막 승리자에게 심판이 “상씨름 나갑니다”하면, 그 상씨름꾼은 환호와 함께 메어 놓은 송아지를 끌고 의기양양하게 씨름판을 돌았다.

지금도 매년 10월 1일이면 봉동씨름은 화려한 부활을 한다. 봉동읍민의 날인 이날에 맞춰 씨름판이 함성으로 넘친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봉동 사람이면 이 씨름에 모여든다. 이기는 사람에게는 박수가, 지는 사람에게는 아낌없는 격려가 보내진다. 근래 들어서는 봉동체육회가 이 행사를 주관하며 여자씨름, 어린이씨름까지 곁들여 참여의 대중화를 시도하고 있다. 봉동씨름의 우승자는 황소가 부상으로 주어졌으나 지금은 시상품을 준비하기 위해서 풍장 치며 지역 주민들이 기부하는 상품으로 대체하고 있다. 술도가에서는 막걸리, 신발가게에서는 신발, 미곡상에서는 쌀, 보리 등 곡식을 후원하여 대회 시상품으로 기부하고 있다. 현재는 전라북도 완주군 체육회 주관으로 시행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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