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홍재철 영세불망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401146
한자 洪在喆永世不忘碑
영어의미역 Memorial Stone for Hong Jaecheol
이칭/별칭 관찰사 홍상국재철 영세불망비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교동 198-2[교동1길 10]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한태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금석각류|영세불망비
건립시기/일시 1861년연표보기
관련인물 홍재철
재질 화강암
높이 139㎝
너비 46㎝
소재지 주소 경상남도 양산시 교동 198-2[교동1길 10]지도보기
소유자 양산시

[정의]

경상남도 양산시 교동 양산향교 앞 비석군에 있는 조선 후기 홍재철을 기리는 영세불망비.

[건립경위]

홍재철(洪在喆)은 1840년에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하였으며, 진심을 다해 백성을 보살펴 피폐한 고을을 개혁하였으며, 백성들이 편안히 살 수 있도록 해주었고, 재물을 불려 국방에도 힘써 백성들을 보호하였다. 이에 홍재철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비가 세워졌다.

[위치]

양산향교 앞 양쪽 비석군 가운데 왼쪽 비석군 뒷줄의 앞줄, 정문 담장으로부터 네 번째에 놓여 있다.

[형태]

비두와 비신 및 비좌로 이루어져 있다. 비석 재질은 화강암으로, 비두는 높이 33㎝, 너비 80㎝, 두께 26㎝로 팔작지붕의 가첨석(加檐石) 모양을 하고 있다. 비신은 높이 139㎝, 너비 46㎝, 두께 19㎝이며, 비좌는 가로 80㎝, 세로 55㎝, 높이 10㎝인데, 왼쪽이 약간 훼손되었다. 비문은 비교적 양호하게 보존되어 있으나 해독할 수 없는 부분도 있다.

[금석문]

비의 앞면 중앙에 큰 글씨로 ‘관찰사홍상국재철영세불망비(觀察使洪相國在喆永世不忘碑)’라 적고, 그 양쪽에 작은 글씨로 4언시를 새겼는데 오른쪽에는 ‘뚜렷한 공의 덕이여, 우리 남방 주군의 모범이로다. 평소의 뜻이 경제에 있은지라 정성을 다하는 마음으로 베풀었네. 폐단으로 결딴 난 판국은 진실로 고질이었으나 일을 따라 바로잡아 바꾸었네. 산촌에서 먹고 쉬는 것은 솥과 숮이 힘을 펴서라네(顯顯公德 式我南州 素志經濟 赤心做施 弊局成痼 隨事矯革 山餉息肩 釜炭紓力)’라고 새겨 있다.

또한 왼쪽에는 ‘殖財武備 捐廩民防 一境咸賴 千□□□ 可磨可鑴 以愛以敬 匪我私公 惟民之誦’이라 새겼다. 비의 뒷면에는 중앙에 큰 글씨로 ‘숭정기원후사신유시월각면립(崇禎紀元後四辛酉十月各面立)’이라 적어 1861년 10월에 각 면이 합심하여 건립했음을 밝혔다.

[현황]

1985년 당시 양산군수였던 이두연이 ‘관찰사홍상국재철영세불망비’를 비롯하여 양산 지역에 흩어져 있던 비석들을 양산시 교동 양산향교의 정문인 풍영루(風詠樓) 앞에 모아두었다. 비석들은 대부분 옛날 관아 터(현 양산문화원)에 있었던 것으로, 비석군은 왼쪽 비석군과 오른쪽 비석군으로 나뉜다. ‘관찰사홍상국재철영세불망비’가 속한 왼쪽 비석군은 길이 14m 40㎝, 높이 50㎝의 철제 보호 난간으로 둘러져 있고, 폭은 5m 26㎝이다. 주변에는 유림회관을 비롯하여, 양산여자고등학교, 춘추공원 등이 있다.

[의의와 평가]

홍재철이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덕치(德治)를 베풀어 피폐한 양산을 번영케 하였음을 20여 년이 지나서까지 기리고 있는 것을 볼 때, 목민관이 가져야 할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알게 해준다. 홍재철의 덕치는 인근 부산의 강서구와 사상구, 그리고 기장에도 같은 제목의 비석이 있는 데서도 확인된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