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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성재 제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403061
한자 晩惺齋題詠
영어의미역 Attaches a Subject, Poem Recite in Manseongjae Buddhist Service for the Deceased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성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한시
작가 안평중(安平重)
창작연도/발표연도 1868년(고종 5)연표보기

[정의]

1868년(고종 5) 안평중이 소계사를 폐하고 서당 만성재의 편액을 걸며 지은 칠언율시의 한시.

[개설]

「만성재 제영」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소토리에 있었던 만성재에 관하여 읊은 칠언율시 형식의 한시이다. 만성재광주안씨의 세칭 삼현오충(三賢五忠)에 대한 제향을 받드는 소계사(蘇溪祠)가 1868년(고종 5)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됨에 따라 안평중이 소계사의 강당을 서당으로 바꾸고 이를 만성재라 칭한 데서 유래하였다.

상해임시정부의 재무차관을 지냈고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된 독립운동가 윤현진(尹顯振)[1892~1921]이 7세 때 만성재에서 한학을 수학했다고 한다. 소계사와 관련하여 1950년에 소계사의 강당을 중건했다고 하는 기록이 있으나, 윤현진만성재에서 한학을 수학했다는 사실과 안평중의 시에 ‘편미인작호(扁楣因作號)’라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만성재는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 직후 지어진 것이라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내용]

수련(首聯)에서는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소토리 언덕 위에 세워져 들판이 내려다보이는 만성재의 위치를 읊고 있다. 본디 소계사에 딸려 있는 강당을 서원철폐령에 따라 ‘만성재’라는 현판을 걸고 서당으로 운영한 것인 만큼, ‘산에 의지해서 학숙을 지었다.’라는 것은 소계사에 대한 지칭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수련에서 ‘소나무울타리’라고 한 것처럼, ‘만성재’라는 현판이 걸렸던 소계서원의 강당 건물 뒤편으로는 지금도 소나무가 울타리처럼 숲을 이루고 있다.

함련(頷聯)에서 ‘우리 선조들의 공덕을 높이고자 한 것’이라 한 것은 소계사가 본디 이른바 삼현오충에 해당하는 안우(安宇)·안주(安宙)·안택(安宅)과 안근(安瑾)·안수(安琇)·안시명(安諟命)·안이명(安以命)·안신명(安信命) 등을 제향하기 위해 세운 것을 말한 것이고, 이를 1868년에 서당으로 바꾸어 운영하게 되었음을 밝힌 것이다.

경련(頸聯)의 ‘아호왕적(鵝湖往蹟)’은 송나라 효종(孝宗) 때인 1175년에 여조겸(呂祖謙)이 육구령(陸九齡)과 그의 동생 육구연(陸九淵)을 광신현(廣信縣)에 있는 아호사(鵝湖寺)로 초청하여 주자(朱子)와 학문의 이동(異同)을 강론하게 했던 일을 말하는 것으로 이는 『송원학안(宋元學案)』에 실려 있다. 아호(鵝湖)는 중국 강서성(江西省) 연산현(鉛山縣)에 있는 산 이름으로, 주자가 육구연 형제와 만나 학문을 논변한 것을 기념하여 아호서원(鵝湖書院)을 세웠다고 한다.

‘아호왕적’에 이어진 ‘청아(菁莪)’라는 구절은 『시경』의 청아편(菁莪篇)에서 따온 말이다. 이 시에 ‘무성하고 무성한 새 발 쑥이여, 저 언덕 가운데 있도다(菁菁者莪 在彼中阿).’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에 대해 「모서(毛序)」에서는, ‘청청자아는 인재를 양성하는 것을 즐거워한 시이다.’라 풀이하였다. 즉, 앞으로 이 만성재에서 새 발 쑥이 무성하듯 인재가 많이 배출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는 바람을 적은 것이다.

‘녹원유풍(鹿院遺風)’이란 주자가 남강(南康)에 백록원(白鹿院)을 세우고 그 운영규칙을 정한 것을 말한다. 이른바 백록원규(白鹿院規)가 그것이다. 주자가 백록원규를 정하여 후학의 강학에 힘쓴 것처럼 만성재에서도 주자의 가르침을 따라 강학에 힘쓰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마지막으로 결련(結聯)에서는 만성재라는 이름의 연유를 말하였다.

“산에 의지해서 학숙을 지으니 우뚝 솟아 정정한데/ 대나무집과 소나무울타리가 먼 들판을 굽어보도다/ 본디 우리 선조들의 공덕을 높이고자 한 것이니/ 그대에게 맡겨 후생이 경영한들 무슨 방해가 되리오/ 아호에 왕래하며 강론하듯 하니 인재들이 배출되고/ 백록원규(白鹿院規) 유풍을 이으니 강당이 향기롭도다/ 특별히 문설주에 편액을 걸고 이름을 지었나니/ 주인이 마음으로 헤아림을 늦게나마 알겠도다(倚山建塾屹亭亭/ 竹院松籬俯遠坰/ 固欲尊吾先世德/ 何妨屬汝後生經/ 鵝湖往蹟菁莪菀/ 鹿院遺風講樹馨/ 特揚扁楣因作號/ 主人心計晩來惺).”

[의의와 평가]

「만성재 제영」은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이 주도한 서원 철폐령에 따라 서원들이 훼철되고 또 일부 서원들이 서당으로의 전환을 통해 명맥을 유지했던 조선 말기의 시대상을 알 수 있게 하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서원의 강당을 서당으로 전환하면서 주자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아호왕적의 고사와 백록원규를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말기에도 주자학적 세계관이 유림에서 여전히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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