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4000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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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高麗-精神的支柱道詵 |
이칭/별칭 | 선각 국사(先覺國師),옥룡자(玉龍子)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종교/불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라남도 영암군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고려/고려 전기 |
집필자 | 최연식 |
[정의]
고려 사회의 기본 사상 중 하나인 풍수지리 이론을 체계화한 영암 출신의 승려.
[도선의 고향 영암]
우리나라 풍수지리의 시조인 옥룡자(玉龍子) 도선(道詵)의 생애는 신비에 가득 싸여 있다. 전국 곳곳에 그와 관련된 신비한 전설이 전해져 오고, 그의 출생 시기나 활동 지역에 대해서도 다양한 전승이 전한다. 하지만 현재 공식적으로 도선의 고향은 영암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즉, 도선의 행적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고려 시대의 옥룡사 선각 국사비와 조선 시대의 영암 도갑사 도선 국사·수미 대선사비는 모두 도선이 영암 출신이라고 이야기하고 있고, 이는 다른 주요 자료들에도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다만 도선의 어머니에 대해서는 옥룡사 선각 국사비에서 강 씨(姜氏)라고 이야기한 것과 달리 영암 도갑사 도선 국사·수미 대선사비를 비롯한 후대의 자료들에서는 대부분 최 씨(崔氏)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영암이 도선의 고향이라는 것을 반영하듯 영암에는 도선과 관련된 많은 유적지가 전하고 있다. 먼저 구림면 성기동(聖基洞)의 성천(聖泉)은 도선의 잉태와 관련된 곳으로, 어머니가 이곳에서 빨래를 하다가 계곡에서 떠내려 오는 오이를 먹고 도선을 잉태하였다고 한다. 성기동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구림(鳩林)과 국사암(國師巖)도 도선과 관련된 전설이 전하고 있다. 도선이 태어난 직후 어머니의 부모는 아직 혼인하지 않은 딸이 낳은 아이를 집 근처 바위틈에 버렸는데, 근처 숲에 있던 비둘기들이 날아와 아이를 보호하는 것을 보고 마음을 바꿔 아이를 데려다 길렀다고 한다. 이때 아이를 버린 바위가 국사암[도선 국사를 버린 바위라는 뜻]이고, 비둘기들이 모여 살던 숲이 구림이라고 한다. 영암 지역의 사찰들 중에도 도선과 관련된 곳이 많다. 군서면 월곡리의 월암사(月岩寺)는 도선이 처음 출가하여 머리를 깎은 곳이라고 하고, 같은 군서면의 도갑사(道岬寺)는 도선이 개창한 사찰이라고 한다. 한편 이웃한 강진군 성전면의 월남사(月南寺)도 도선이 어릴 때 수학한 사찰이라고 전하고 있다.
영암 지역 중에서도 구림을 비롯한 군서면 지역에 도선과 관련된 유적지가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는데, 이는 도선의 출생지가 바로 구림 마을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도선의 실제 모습]
도선은 이처럼 영암 출신의 인물로 이해되고 있지만 이러한 인식은 고려 중엽 이후에 비로소 나타난 것이었다. 그 이전에 도선은 일반인과는 다른 전설적 인물이자 신승(神僧)으로 여겨졌고, 구체적 출신지나 집안 등은 그다지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고려 중엽에 도선의 구체적 행적이 그려지게 된 것은 그 무렵 도선을 국사(國師)로 추증하면서 이를 기념하는 비문을 짓게 된 것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당시 일반적인 고승들의 비문과 마찬가지로 도선의 비문에도 집안과 출생지를 비롯하여 구체적 행적들이 기록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 과정에서 신승이던 도선이 보다 구체적 행적을 지닌 인간의 모습으로 그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1150년에 최유청(崔惟淸)이 왕명을 받들어 지은 「해동 백계산 옥룡사 증시 선각 국사비명(海東白雞山玉龍寺贈諡先覺國師碑銘)」에서는 도선의 생애를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도선은 태종무열왕의 후손으로 통일 신라 후기인 827년(흥덕왕 2)에 영암에서 태어났고, 15세에 월유산(月遊山) 화엄사(華嚴寺)로 출가하였다. 5년 동안 『화엄경』을 공부하다가 교학의 한계를 깨닫고, 20세 되던 846년(문성왕 8)에 동리산(桐裏山)에서 수행하던 적인 선사 혜철(慧徹)에게 나아가 ‘무설지설(無說之說)’과 ‘무법지법(無法之法)’의 선(禪)을 배웠다. 849년 구족계를 받아 정식 승려가 된 후 각지를 돌아다니며 수행하다가 지리산 구령(甌嶺)에서 이인(異人)을 만나 음양오행술과 풍수지리를 배웠다. 38세 되던 864년(경문왕 4)에 광양의 백계산(白鷄山)에 옥룡사(玉龍寺)를 중수하고 이곳에 머무르며 많은 제자들을 길렀다. 이후 줄곧 옥룡사에서 수행하였지만 중간에 신라 왕실의 초청을 받아 궁중에서 선법(禪法)을 설하고 송악(松嶽)을 방문하여 고려 태조의 탄생과 후삼국 통일을 예언하기도 하였다. 898년(효공왕 2)에 72세로 옥룡사에서 입적하자 제자들이 그곳에 부도를 건립하였다. 효공왕은 선사의 시호를 내리고 박인범(朴仁範)에게 비문을 짓게 하였다. 하지만 후삼국의 혼란으로 비문은 지어지지 못하였고, 고려 의종 때 선각 국사(先覺國師)로 추봉된 것을 계기로 비로소 탑비를 건립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도선의 행적은 지리산에서 이인을 만나 음양오행술과 풍수지리를 배운 것과 송악을 방문하여 왕건의 탄생과 후삼국 통합을 예언한 것을 제외하면 신라 말 선사들의 일반적 행적과 통하는 것이었다. 어려서 출가한 승려들이 교학을 공부하다 교학의 한계를 느끼고 선종으로 전향하고, 유명한 선승의 문하에서 수학한 후 여러 지역을 다니며 수행을 거듭하다가 자신의 산문을 개창하여 문도들을 양성하는 것이 신라 말 주요 선승들의 일반적 행적이었다.
그런데 최유청의 선각 국사비명에 언급된 도선의 행적들은 대부분 다른 선사들의 비문에 보이는 것과 같은 내용들이고, 도선만의 독자적인 행적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어려서 월유산 화엄사에서 출가하여 『화엄경』을 공부하고 후일 옥룡사를 중수하여 그곳에 머무른 것은 동진 대사 경보(慶甫)의 비문에 보이는 것과 같은 내용이고, 동리산에서 적인 선사에게 배웠다는 ‘무설지설(無說之說)’과 ‘무법지법(無法之法)’의 가르침은 적인 선사의 비문에 적힌 적인 선사가 중국에서 수학한 선의 내용이었다. 신라 말에 효공왕이 시호를 내리고 박인범에게 비문을 짓게 하였지만 후삼국의 혼란으로 비석이 건립되지 못한 것은 징효 대사 절중(折中)의 비문에 보이는 이야기와 같다. 한편 ‘선각 국사’라는 시호는 선각 대사 형미(逈微)의 시호와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이 최유청의 선각 국사비명에 보이는 도선의 행적 중 전설적 성격이 강한 지리산에서의 음양오행술과 풍수지리의 수학, 송악에서의 고려 왕조 개창 예언을 제외한 나머지 사실들은 도선의 실제 행적이 아니라 신라 말에 활동한 여러 선사들의 행적을 발췌하여 새롭게 구성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 왕조가 발전하면서 왕조의 정당성을 보장하는 도선을 신비로운 전설적 인물이 아니라 보다 구체적인 역사적 인물로 기억하려는 정치적·사회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하여, 과거 여러 선사들의 행적을 토대로 도선의 생애를 구성해 냈던 것이다.
[도선과 선각 국사 형미]
최유청의 선각 국사비명에 그려진 도선상(像)의 실제 모델과 관련하여 ‘선각’이라는 같은 시호를 가졌던 선각 대사 형미가 특히 주목된다. 형미는 본래 월출산 남쪽 무위사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전라도 남부 지역을 공격하러 온 궁예와 만나 그와 함께 후고구려의 수도 철원으로 이주하였다. 철원에서 처음에는 궁예의 존숭을 받았지만, 궁예가 점차 주변 사람들을 의심하면서 형미 역시 다른 사람과 손잡고 왕위를 노린다는 의심을 받아 처형되었다. 궁예가 의심한 다른 사람은 정황상 왕건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태조 왕건의 고려 왕조 개창을 예언하였던 도선의 행적을 구성할 때 일찍이 왕건을 위하여 궁예에게 희생되었던 형미의 존재는 중요하게 반영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현재는 ‘선각’이라는 시호에서만 공통점을 찾을 수 있지만 도선의 고향이 영암으로 기록된 것도 형미의 영향이라고 생각된다. 형미의 비문이 마멸되어 그의 출신지가 무주(武州) 관내라는 것밖에 확인되지 않지만 여러 정황상 영암 출신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형미가 출가하여 머무른 장흥 보림사와 해남 도륜산[두륜산], 강진 무위사 등이 모두 영암에서 가까운 곳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각 대사 형미는 도선의 행적에 ‘선각’이라는 시호와 고향 영암 등 두 가지 점에서 영향을 미쳤는데, 고향과 시호가 각기 탄생과 죽음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최유청의 선각 국사비명이 참고한 여러 승려들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흔적을 남겼다고 할 수 있다. 고려 전기에는 아직 영암에 속하였던 무위사에서 활동하였고, 그곳에 비문을 남겼던 선각 대사 형미의 모습이 도선에게 중요하게 투영되었고, 그로 인해 도선이 영암의 인물로 여겨지게 되었던 것이다.
[도선과 비보사탑설]
최유청의 선각 국사비명에 서술된 도선의 행적이 다른 선사들의 행적을 토대로 재구성된 것이기는 하지만, 도선이라는 인물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던 가공의 인물이라고는 할 수 없다. 고려 초에 이미 풍수지리의 대가로서 명명되었을 뿐 아니라 그의 가르침이 구체적으로 전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라 말에 활동한 선종 승려로서 풍수지리에 능했으며 비보사탑설을 체계화한 도선이라는 인물이 있었던 것은 역사적 사실로 생각된다. 다만 도선에 관해서는 신비적인 전설만이 전하고 구체적 행적이 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역사화하는 과정에서 부득이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여러 선승들의 비문을 토대로 도선의 행적을 재구성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승려 출신인 도선은 중국의 풍수지리 이론을 수학한 후 우리 사회의 자연 환경과 문화에 맞는 독자적인 풍수지리 이론을 제시하였고, 이것이 고려 시대 풍수지리 사상의 정통적 이론으로 수용되었다. 태조는 「훈요십조(訓要十條)」에서 사찰을 건립할 때 도선의 가르침을 어기지 말라고 당부하였고, 후대의 풍수지리 논의에서도 언제나 도선의 이론이 정통으로 받들어졌다.
김위제(金謂磾)나 묘청(妙淸) 등 고려 시대 대표적 풍수지리 전문가들은 자신들이 도선의 후계자임을 자처하였고, 도선의 가르침을 기록하였다는 『삼한회토기(三韓會土記)』·『도선기(道詵記)』·『도선 답산가(道詵踏山歌)』·『해동 비록(海東秘錄)』·『도선 밀기(道詵密記)』·『옥룡기(玉龍記)』 등이 고려 시대의 대표적 풍수서로서 권위를 가졌다. 고려 왕조가 풍수지리를 통해 왕조의 정통성을 확보하였던 것처럼 고려의 풍수지리 사상은 도선을 내세워 사상적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도선의 풍수지리 사상은 단순히 땅의 기운의 좋고 나쁨을 가리는 데서 그치지 않고, 좋지 않은 땅에 인위적 조작을 함으로써 나쁜 기운을 없애고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비보(裨補)를 강조한 점을 특징으로 들 수 있다. 특히 사찰 또는 불탑을 건립하는 비보사탑설(裨補寺塔說)을 주창하였는데, 땅의 기운이 좋지 않은 산천의 역처(逆處)나 배처(背處) 혹은 땅의 기운이 쇠퇴하는 곳에 사찰과 불탑을 건립하면 땅의 기운을 보완하여 사회와 국가의 쇠망을 막을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한편 이와 반대로 산천 지세에 어긋나게 사찰과 불탑을 건립하거나 비보를 위해 건립한 사찰과 불탑을 파괴하면 나라가 망하고 백성이 불행하게 된다고도 하였다. 이러한 도선의 비보사탑설은 불교가 성행하였던 고려 사회에서 대단히 중요한 사상으로 받아들여졌다. 기존의 사찰들은 자신들이 비보사탑설에 의거하여 건립된 국가의 비보라며 사회적 중요성을 주장하였고, 사찰의 난립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비보의 기능을 하지 않는 사찰들의 철폐를 주장하기 위하여 비보사탑설을 내세웠다. 이런 분위기에서 비보사탑설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여러 서적들이 도선의 이름을 빌어 출현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