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4009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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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道詵 |
이칭/별칭 | 요공 국사(了空國師),선각 국사(先覺國師),지리 국사(地理國師) |
분야 | 종교/불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종교인 |
지역 |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구림리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
집필자 | 최연식 |
출생 시기/일시 | 826년 - 도선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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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서품 시기/일시 | 841년 - 도선 월유산 화엄사에서 출가 |
수학 시기/일시 | 846년 - 도선 동리산파의 개조 혜철 문하에서 수학 |
활동 시기/일시 | 846년 - 도선 선종으로 전향 혜철에게서 심인을 받음 |
활동 시기/일시 | 849년 - 도선 천도사에서 수계 |
활동 시기/일시 | 863년 - 도선 광양 옥룡사에 주석 |
몰년 시기/일시 | 898년 3월 10일 - 도선 입적 |
추모 시기/일시 | 1172년 - 「해동 백계산 옥룡사 증시 선각 국사비」 건립 |
추모 시기/일시 | 1653년 4월 - 옥습 대사에 의해 「도갑사 도선 국사·수미 선사비」 건립 |
출생지 | 영암 구림 -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
학교|수학지 | 월유산 화엄사 - 전라남도 구례군 마산면 화엄사로 377-12[황전리 12] |
학교|수학지 | 동리산 대안사 - 전라남도 곡성군 죽곡면 태안로 622-215[원달리 20] |
활동지 | 백계산 옥룡사 - 전라남도 광양시 옥룡면 운암길 83[추산리 295] |
성격 | 승려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왕사 |
[정의]
남북국 시대 영암 출신의 승려.
[개설]
법휘는 도선(道詵), 시호는 요공(了空), 선각(先覺). 속성은 김씨(金氏)이며 영암에서 출생하였다. 신라 흥덕왕 원년인 826년에 출생하였고, 15세에 출가하여 불경을 공부하다가 20세에 선종으로 개종하고 동리산파 개조인 혜철(惠哲)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863년(헌안왕 4)부터 35년간 백계산(白谿山) 옥룡사(玉龍寺)에 주석하며 제자들을 양성하다가 898년(효공왕 2)에 72세로 입적하였다. 풍수지리설의 대가로서 고려 태조(太祖) 왕건의 집터를 잡아 주고 그에게 지리(地利)를 가르친 일화로 잘 알려져 있다.
[생애와 행적]
도선(道詵)[826~898]의 생애에 대해 전하는 자료로는 고려 시대에 찬술된 「옥룡사 선각 국사비」와 조선 시대에 찬술된 「도갑사 도선 국사·수미 선사비」가 있는데, 옥룡사 비의 내용이 좀 더 구체적이다. 이에 따르면 도선은 신라 태종무열왕의 서손(庶孫)으로, 어머니는 강씨(姜氏)였다. 826년에 출생하여 불교적인 가풍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였고, 15세가 되던 841년(문성왕 3)에 월유산(月游山)[현 지리산] 화엄사(華嚴寺)에 출가하여 불경을 공부한 지 1년 만에 대의를 통달하였다고 한다.
도선은 20세가 되던 846년(문성왕 8)에 교법을 떠나 스스로 선정 수행을 하려 하였는데, 마침 혜철 화상이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와 현재의 전라남도 곡성군 동리산 대안사(大安寺)에서 가르침을 편다는 이야기를 듣고 혜철의 문하에 가서 수학하였다. 이후 운봉산(雲峯山)과 태백산(太白山) 등 각처를 유람하면서 수행하였다. 도선이 풍수지리설의 이론과 실제를 익힌 것도 바로 이 시기로서, 전국 산천의 형세를 파악하는 과정에서 풍수지리설과 당시의 시대상에 대한 인식이 결부되어 비보사탑설(裨補寺塔說)을 제창하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도선은 863년(헌안왕 4) 37세의 나이로 희양현(曦陽縣)[현 전라남도 광양시] 백계산 옥룡사에 주석하여 35년간 머물면서 제자를 양성하였다. 헌강왕(憲康王)의 초빙으로 궁궐에서 설법하였지만 수도의 번잡함을 싫어하여 얼마 후에 다시 옥룡사로 돌아왔다. 옥룡사에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입적을 예언한 후 898년(효공왕 2) 3월 10일에 향년 72세로 입적하였다.
[사상과 저술]
도선은 선승이었지만 풍수지리설의 대가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도선이 풍수지리설을 수학한 배경에 대해 『고려사』와 도갑사 비에서는 중국에 유학하여 밀교 승려인 일행(一行)에게서 지리법(地理法)[풍수설]을 배워왔다고 하였으나, 일행은 도선 보다 백여 년 전에 활동하였던 인물이기 때문에 설득력이 약하다. 반면, 옥룡사 비에서는 지리산 구령(甌嶺)에서 수행할 때 이인(異人)을 만나 구례현 경계 지점의 남해변에서 풍수설을 전수받았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후 도선은 당시의 시대상에 대한 인식과 풍수지리설을 결부하여 지기 쇠왕설(地氣衰旺說)과 비보 사탑설(裨補寺塔說)을 주장하였는데, 고려 시대에는 도선의 풍수 사상이 국가적으로 널리 수용되었다.
도선의 풍수지리설이 고려 왕조에 끼친 영향은 태조의 「훈요십조」에서도 확인된다. 즉, 제2조에서 “도선이 선정한 곳 외에 함부로 사원을 지으면 지덕을 훼손시켜 국운이 길지 못하게 되므로 함부로 사찰을 건립하지 말라.”라고 훈계하고 있다. 이는 도선과 도선의 풍수지리설이 고려의 건국과 국정 운영에 미친 영향이 자못 컸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고려 시대에 도선은 고려의 건국을 예언한 인물로서도 널리 숭상되었다. 송악에서 고려 태조 왕건의 아버지인 왕용건(王龍建)을 만나 왕자(王者)가 출생할 터를 잡아 주고 “2년 후에 귀한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예언하였으며, 왕건이 17세가 되던 해에 왕건에게 지리(地利), 천시(天時)를 알려 주어 후삼국 통일을 이룰 수 있게 하였다는 일화가 널리 유포되었다.
최근에는 도선의 사상을 풍수지리설로만 설명하는 것을 비판하며 도선의 사상적 기반이 선에 있었으며, 선을 바탕으로 여러 사상을 융합하는 사상 경향 속에서 도선의 풍수지리설이 형성되었다는 견해들도 제기되고 있다.
[묘소]
옥룡사 비에 따르면 도선이 옥룡사에서 입적한 후 효공왕(孝恭王)으로부터 ‘증성혜등(證聖慧燈)’이라는 탑명(塔名)이 내려졌다고 한 것을 근거로 도선의 부도가 옥룡사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1997년에 순천 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실시된 옥룡사 발굴 조사에서 부도전 최하층에서 통일 신라 때의 와편들이 출토된 것을 들어 이 유구를 도선의 부도로 추정한 견해가 제시된 바 있다.
[상훈과 추모]
도선이 입적한 후 효공왕에 의해서 요공 국사(了空國師)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도선은 고려 태조 왕건과의 관계에 의해 고려 후기까지 줄곧 추앙을 받았으며, 현종 대에는 대선사(大禪師)로, 숙종 대에는 왕사(王師)로, 인종 대에는 선각 국사(先覺國師)로 추증되었다. 1150년(의종 4)에 왕명으로 「선각 국사비(先覺國師碑)」가 찬술되어 1172년(명종 2) 옥룡사에 건립되었고, 1653년(조선 효종 4)에는 도선이 머물렀다고 전하는 영암 도갑사에 도갑사 도선 국사·수미 선사비가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