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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400014
한자 月出山-佛敎文化-遺蹟
분야 종교/불교,문화유산/무형 유산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남도 영암군
집필자 최연식

[정의]

전라남도 영암군 소재 월출산을 무대로 하여 고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발전하였던 불교문화 및 그와 관련된 유적들.

[개설]

남쪽의 소금강으로 불리는 월출산은 고대부터 영산(靈山)으로 여겨져 왔다. 통일 신라 때에는 국가 제사지 중의 하나인 소사(小祀)로 지정되었고, 이후에도 지역의 대표적 신성 지역으로 여겨져 왔다. 불교 수용 이후 전통적 신성 지역은 불교의 성지로 변하여 불교 신앙의 주요 무대가 되는데, 월출산도 예외는 아니었다. 영암에 불교가 처음 수용된 백제 후기 이후 월출산은 서남해 지역의 대표적 불교 성지로서 자리 잡았다. 많은 승려와 신자들이 이곳에서 수행과 신앙 활동을 전개하였고, 그 결과 주요한 사찰과 불상, 석탑들이 만들어졌다. 현재까지 전통이 이어지는 사찰은 도갑사(道岬寺)와 무위사(無爲寺) 등 몇 개 사찰에 불과하지만, 한때 월출산에는 90여 개의 사찰과 암자가 있었다고 전한다. 산속 곳곳에 남아 있는 많은 절터와 불상, 석탑 등은 그러한 전승이 사실과 다르지 않음을 반영하고 있다.

[백제 시기의 불교문화와 유적]

월출산 지역에서 불교문화가 처음 확인되는 것은 백제 후기인 7세기 초이다. 중국의 『속고승전(續高僧傳)』에는 백제 남쪽 달나산(達拏山)에서 수행하였던 혜현(慧顯)이라는 승려의 다음과 같은 행적을 전하고 있다.

승려 혜현(慧顯)은 백제국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마음을 굳게 하고 열심히 수행하였다. 『법화경』을 독송하는 것을 주된 수행으로 하였다. 복과 바라는 바를 빌면 이루어지는 것이 많았다. 삼론(三論)을 강의하는 것을 듣고 곧바로 따라서 공부하였다. 가르침을 듣고 나서 그 수행하는 바를 더욱 열심히 하였다. 처음에는 나라 북쪽의 수덕사(修德寺)에서 머물렀는데 대중이 모이면 강의하고 없으면 홀로 경전을 독송하였다. 사방에서 혜현의 명성을 듣고 산으로 찾아오니 머물던 곳이 소란스러워졌다. 이에 곧 남방의 달나산(達拏山)으로 갔다. 달나산은 매우 깊고 험준하며 낭떠러지가 겹쳐지고 바위로 가득했다. 비록 다니는 사람들은 있었지만 오르는 것이 매우 위태로울 정도였다. 혜현은 그 가운데 고요히 앉아서 이전과 같이 수행을 계속하다가 마침내 그곳에서 임종하였다. 같이 공부하던 동료가 시체를 옮겨 석굴 가운데에 두었다. 호랑이가 시체를 먹으니 뼈도 모두 없어졌지만 해골과 혀만은 그대로 남았다. 3주년이 지나자 그 혀는 살아 있을 때보다 더욱 붉고 부드럽게 되었다. 그 후에는 점점 변하여 보랏빛 돌처럼 단단하게 되었다. 승려와 속인들이 이상하게 생각하고 공경하였으며 그것을 석탑에 모셨다. 나이가 58세였으며 당나라 정관(貞觀)[627~649) 초였다.[『속고승전』 중 혜현 관련 부분]

혜현이 옮겨 와 활동하였던 달나산은 월출산의 백제 때 이름이었다. 후대에 달나산을 달[月]이 나온다[生/出]는 뜻으로 해석하여 월생산(月生山) 혹은 월출산(月出山)으로 부른 것이라 생각된다. “매우 깊고 험준하며 낭떠러지가 겹쳐지고 바위로 가득했다.”라는 달나산의 모습도 월출산의 모습과 일치하는 것이다. 혜현이 달나산, 즉 월출산으로 옮겨 온 것은 이 지역에 불교가 전래되어 믿고 받들어졌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런데 수도 근처에서 활약하던 혜현이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월출산 지역으로 옮겨온 것은 당시 백제에서 월출산이 관음 신앙의 성지로 인식되었던 것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에서는 백제에 불교를 전한 마라난타(摩羅難陀)에 대해 서술하면서 다음과 같이 백제 남쪽에 있는 월악(月岳)에 관음의 궁전이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삼한(三韓)은 염부제(閻浮提)의 동북변에 있으며 해도(海島)가 아니다. 부처님이 열반한 후 6백여 년이 지나서 [삼한의 불교가] 시작되었다. [삼한] 가운데에는 성인이 머무르는 산이 있는데 이름을 실리무달리(實利毋怛梨)라고 한다. 중국말로 번역하면 삼인산(三印山)이다. 뾰족한 봉우리가 높이 솟아 있고 관세음보살의 궁전이 그 산 꼭대기에 있다. 곧 월악(月岳)이다. 이곳에 살아 보지 않으면 그 모습을 모두 다 쓸 수가 없다.[『해동고승전』 중 마라난타 관련 부분]

여기에서 언급된 월악은 통일 신라 때 월나악(月奈岳)으로 불린 월출산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관음보살은 보통 남쪽 바닷가의 바위산에 머무는 것으로 여겨졌는데, 당시 백제 지역에서 이러한 조건에 부합하는 곳은 월출산 외에 찾기 힘들다. 백제에서는 6세기 이후 관음 신앙이 널리 행해졌는데, 경전에 언급된 것과 같은 지리적 조건을 갖춘 월출산이 관음보살이 머무는 곳으로 여겨지며 중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혜현월출산에서 수행하며 명성을 떨쳤고, 이후 이 지역에 불교문화와 불교 신앙이 본격적으로 전래되었을 것이다. 최근까지 월출산 지역에서 백제 불교문화의 흔적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최근 월출산 남쪽 고려 시대의 월남사지 발굴 과정에서 백제의 기와가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7세기 이후의 것으로 보이는 이들 기와는 백제 후기 이곳에 대규모 건물이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인데, 입지 조건이나 후대에도 이곳에 사찰이 지속되었던 사실 등으로 미루어 볼 때 대형 사찰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혜현 당대 혹은 그 이후에 건립된 사찰일 가능성이 높다. 향후 이곳에 대한 발굴이 진행되면 백제 시기 월출산 지역의 불교문화가 구체적으로 밝혀질 수 있을 것이다.

[통일 신라 시기의 불교문화와 유적]

월출산 지역의 불교는 통일 신라 시기에도 지속적으로 발전하였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그 모습을 알려 주는 구체적 기록이나 유물은 많지 않다. 월출산 동쪽 사자봉 아래에 있는 천황사 주변을 발굴할 때 고려 시대 목탑지 아래에서 신라 시기의 건물지 유구가 발견되었는데, 신라의 사찰일 가능성이 있다. 그 밖의 신라 시기 절터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영암군 군서면에서 발견된 통일 신라 시기의 석비를 통하여 이 지역에 불교 신앙이 성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석비에는 다음과 같은 4행 40여 자가 기록되어 있는데, 마모가 심하여 판독되지 않는 글자가 적지 않다.

①貞元二年丙寅五月十日渚坪外香藏內不忘

②立□奇卅夫□□□□中 合香十束

③入奇□人名 力知 焉生 右

④仁閂

일부 판독되지 않는 글자들로 인해 비문 내용에 대한 완전한 해석은 어렵지만, 다행히 비석 건립 시기와 건립 목적을 기록한 첫 번째 행은 거의 대부분 온전하게 판독된다. 첫 번째 행은 ‘정원(貞元) 2년 5월 10일에 저평(渚坪) 바깥에 향을 묻고 잊지 않기 위해 [비석을 건립한다]’는 내용으로 해석된다. 정원 2년은 786년(원성왕 2년)으로 통일 신라 후기이고, 저평(渚坪)은 물가의 땅을 의미한다. 2행에 보이는 ‘합 향 십 속(合香十束)’은 이때 묻은 향의 분량을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향 10속(束), 즉 열 다발을 묻었던 것이다. 3행과 4행은 이 일에 관여한 주요 인물들의 이름을 기록한 것으로 생각된다.

물가 근처의 땅에 향을 묻은 것은 후대 자료에 다수 보이는 매향(埋香)과 관련된 것이다. 매향은 후세에 올 부처님께 공양할 침향(沈香)을 만들기 위해 향나무를 바닷가 갯벌에 묻어 두는 것이다. 향나무를 갯벌에 백 년 이상 묻어 두면 고급 침향이 되기 때문에, 미래에 공덕을 쌓기를 원하거나 미륵불의 탄강을 기원하는 사람들이 이러한 매향을 행하였다. 매향을 한 사람들은 그 사실을 매향한 곳 근처의 바위나 비석에 새겨 두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갯벌에 묻은 향나무가 후대에 잊히지 않고 제대로 활용되기를 바란 것이었다. 이러한 매향 사실을 기록한 매향비 혹은 매향 암각은 현재 20여 건 가까이 확인되고 있는데, 대부분 고려 시대부터 조선 초까지의 것이다. 군서면의 ‘영암 정원명 석비’는 통일 신라 시기의 매향 사실을 기록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매향비이다.

이 매향비가 발견된 곳은 월출산 서북쪽 지역으로, 현재는 간척되어 논이 되었지만 통일 신라 당시에는 바닷물이 들어오던 갯벌로서 매향을 하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이 매향비를 통하여 786년(원성왕 2) 당시 월출산 지역에 매향을 행하던 불교 신자 집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영암 지역의 사람들로 추정되는데, 아마도 월출산에 있는 사찰을 기반으로 하여 신앙 활동을 하였을 것이다. 기록에는 남아 있지 않지만 이 매향비를 통하여 통일 신라 대에도 월출산 지역에 불교 신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신라 말 선종(禪宗)이 수용되면서 월출산 지역에도 선종 산문(山門)이 출현하였다. 월출산 남쪽의 무위사가 바로 그것이다. 중국에 유학하여 선(禪)을 수학하고 돌아온 형미(逈微) 스님이 905년(신라 효공왕 3)부터 912년까지 이곳에 머무르며 선을 펴고 문도들을 양성하였다. 형미 스님은 912년에 서남해 지역을 정벌하러 온 궁예(弓裔)를 만나 그와 함께 후고구려 지역으로 옮겨가 활동하였다.

[고려 시대의 불교문화와 유적]

월출산의 불교문화가 가장 활발하게 꽃을 피웠던 것은 고려 시대이다. 이 시기에 월출산 지역에는 여러 사찰들이 건립되었고, 이곳을 무대로 많은 승려들이 활동하였다. 먼저 고려 건국 직후에 형미가 머물렀던 무위사가 크게 중수되었다. 후고구려로 옮겨가 활약하던 형미는 917년 궁예의 미움을 받아 처형되었는데, 고려가 건국된 이후 태조 왕건형미의 억울한 죽음을 신원해 주고 선각 왕사(先覺王師)라는 법호를 하사하였다. 아울러 형미가 머물던 무위사를 중창하고 이곳에 형미의 행적을 기록한 탑비를 건립하였다. 아마도 형미는 후고구려 말기 왕건을 지지하였고, 그 때문에 처형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후 무위사는 서남해 지역의 대표적 선종 사찰로 면면히 계승되었다.

고려 초에는 또한 월출산 북쪽 영암읍내 인접한 곳에 성풍사(聖風寺)가 건립되었다. 현재 성풍사는 절터만 남아 있는데, 절터의 규모나 건물 기단의 흔적 등으로 볼 때 상당한 규모의 사찰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시대에는 각 고을의 읍치에 고을의 발전과 지역민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신앙 거점인 자복사(資福寺)가 하나씩 건립되었는데, 읍치와의 거리나 사찰 규모 등으로 볼 때 성풍사가 바로 영암의 자복사였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특히 성풍사지의 오층 석탑에서 발견된 탑지(塔誌)에는 1009년(목종 12)에 고을 호장(戶長)인 박문영(朴文英)이 발원하여 건립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데, 고을 유력자인 호장이 관여한 것도 성풍사가 영암의 자복사였을 가능성이 크다는 걸 보여 준다.

11세기에는 월출산 북쪽의 도갑사도 크게 중수되었다. 도갑사는 신라 말기에 창건된 것으로 전하는데, 고려 중엽인 11세기에 들어와 큰 사찰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도갑사의 현황을 보여 주는 자료로는 1090년(선종 7)에 만들어진 3개의 장생(長生)이 있다. 장생은 사찰의 영역을 나타내는 경계 표시물로서, 보통 돌로 만들어졌다. 장생의 내부는 사찰의 영역으로서 사냥 등이 금지되고 사찰이 독점적으로 그 지역을 이용하였다. 이러한 장생은 왕실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 특별한 사찰들에 건립되었는데, 현재까지 청도 운문사, 양산 통도사, 장흥 보림사 등에서 이러한 장생의 존재가 확인되고 있다. 도갑사 주변에 남아 있는 3개의 장생 중 2개에는 ‘국장생(國長生)’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고, 나머지 하나에는 ‘황장생(皇長生)’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각기 국가와 왕실에서 인정한 장생이라는 의미로, 당시 도갑사가 국가와 왕실에 의해 보호되었음을 알 수 있다. 도갑사는 이후 월출산 지역의 대표적 사찰로서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

고려 후기인 13세기 초에는 월출산 남쪽 지역에 월남사(月南寺)가 크게 중창되었다. 이곳은 본래 백제 때부터 사찰이 있었던 곳인데, 당시 무인 집정자 최항(崔沆)이 주도하여 크게 중창하였다. 최항은 애초 승려로 출가하여 수선 결사(修禪結社) 제2세 주법(主法)인 진각 국사 혜심(慧諶)의 문하에 있다가 후일 환속하여 아버지 최이(崔怡)를 이어 무인 집정자가 되었다. 스승 혜심이 입적한 이후 이곳을 크게 중창하고 스승의 탑비를 건립하여 현창하였다. 월출산에서 가장 유서 깊은 사찰을 중창하여 스승의 탑비를 모심으로써 스승과 자신의 명예를 드러내고자 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월남사는 조선 시대까지도 사세가 크게 유지되었으며 많은 승려들이 이곳에서 생활하였다.

월출산 기슭에 무위사와 성풍사, 도갑사, 월남사 등의 대규모 사찰이 건립되어 발전하였지만 산 위에도 다수의 소규모 사찰과 암자가 발전하였다. 용암사(龍巖寺)와 약사난야(藥師蘭若)는 그중에서도 관련 기록이 전하는 중요한 유적들이다. 구정봉 아래에 있던 용암사는 고려 시대에 건립된 소규모 사찰로 생각된다. 현재는 고려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되는 마애불과 석탑 등이 남아 있는데, 고려 무인 집권기의 문인 김극기(金克己)가 당시 이곳의 모습을 읊은 시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전하고 있다. 김극기는 이 시에서 바다를 오가는 상인들이 멀리 산꼭대기에서 비치는 신령한 빛을 따라 산 위에 올라왔다가 마애불을 보고 감동하여 머물러 수도하였다는 전설을 이야기하고 있다.

월출산 남쪽에 있던 약사난야는 고려 무인 집권기에 백련 결사(白蓮結社)를 개창하였던 원묘 국사 요세(了世) 스님이 수행하였던 암자이다. 요세는 처음 보조 국사 지눌(知訥)이 개창한 정혜 결사(定慧結社)에 참여하여 수행하다가, 선종의 가르침만을 중시하는 정혜 결사와는 별도로 자신이 속한 천태종의 가르침에 입각한 수행 결사의 결성을 모색하였다. 이를 위해 1208년(희종 4)부터 월출산에 들어와 수행하였는데, 이때 머무른 곳이 약사난야였다. 요세는 이곳에서 천태종의 가르침에 입각하여 철저한 참회 수행과 염불 신앙을 전개하며 많은 문도들을 양성하였다. 요세의 명성이 널리 알려지자 월출산 근처 강진 지역의 사람들이 강진 지역의 사찰로 옮기기를 청하였고, 요세는 그들의 후원을 받아 만덕산 옛 절터에 새롭게 사찰을 창건하고 1216년 그곳으로 옮겨 백련 결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월출산 약사난야는 고려 후기 대표적 불교 결사인 백련 결사의 출발지였던 것이다.

[조선 시대의 불교문화와 유적]

숭유억불 정책을 취한 조선 시대에 들어와 월출산 지역의 불교문화는 고려 시대에 비하여 크게 위축되었다. 하지만 월출산 지역의 불교문화 전통은 조선 시대에도 면면히 계승되었다. 특히 월출산 남쪽과 북쪽의 대표적 사찰인 무위사와 도갑사는 조선 시대에도 월출산 지역 불교문화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무위사는 왕실 조상들의 명복을 비는 수륙재(水陸齋)를 거행하는 사찰로 지정되었고, 도갑사는 이 사찰 출신인 묘각 화상 수미 선사(守眉禪師)세조의 총애를 받으면서 왕실과 긴밀하게 연결되었다. 이러한 배경 아래 무위사와 도갑사는 각기 세종세조 때에 왕실의 후원을 받아 크게 중수되었고, 이후에도 왕실의 후원 아래 일정한 사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왕실의 후원 아래 발전한 무위사와 도갑사에는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불화들도 봉안되어 있었다. 무위사 극락보전의 후불탱화는 아미타불과 관음보살, 지장보살을 그린 아미타 삼존도로서, 고려 시대의 불화를 계승한 조선 초기의 가장 뛰어난 후불탱화로 일컬어지고 있다. 또한 후불탱화 이면의 백의관음도(白衣觀音圖) 역시 후불탱화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서 후대에 제작된 여러 백의관음도 벽화의 전범이 된 작품이다. 한편 도갑사 불전에는 1550년(명종 5) 왕실의 발원으로 제작된 「관세음보살 32응신도(觀世音菩薩三十二應身圖)」가 봉안되어 있었다. 관음보살이 32가지 모습으로 변하여 여러 어려움에 처한 중생들을 구원하는 모습을 그린 이 그림은 조선 전기의 대표적 불화이지만 안타깝게도 국외로 유출되어 현재는 일본 교토의 지은원(知恩院)에 소장되어 있다. 무위사 후불탱화와 도갑사 관세음보살 32응신도 모두 조선 전기 회화를 대표하는 동시에 당시 월출산 지역의 불교문화를 대표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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