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4004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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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於蘭鎭 |
이칭/별칭 | 어란,난량,어란량,송지 어란진,어란 수군진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전라남도 영암군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변남주 |
[정의]
조선 시대에 영암군에 속하였던 지금의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어란리 등에 있었던 수군진.
[개설]
한반도의 서남 끝단에 위치해 있는 송지 어란은 고대부터 한중일 국제 해상로뿐만 아니라 제주도 해로와 조운로의 중간 기착지로 매우 중요한 곳이다. 어란포진은 조선 시대 수군 만호진이 머물렀던 곳인데, 두 차례 이동되어 현재의 해남군 송지면 어란리에 정착하였다. 첫 번째는 해남현 화산면 연곡리 삼촌포[해남현 남쪽 9.82㎞(25리)]에 있었다. 두 번째는 해남현 섬[해남현 남쪽 13.35㎞(34리)]으로 이동했다. 세 번째가 당시 영암군 송지면 어란이다. 현재 송지면 어란에는 만호진성의 흔적 등이 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 시대의 왜구의 방어, 조운, 세곡 징수 등의 역할을 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관련 기록]
『영암읍지(靈巖邑誌)』에 보면, “어란포진은 남쪽 150리[58.9㎞]에 있는데, 성 주위가 1407척[426.36m], 우물이 1곳 있으며, 해남에서 본군으로 이속되었다[於蘭浦鎭南一百五十里城周一千四百七尺井一白海南移屬本郡].”라고 하였다.
[내용]
초기 어란진(於蘭鎭)[난량]에 관한 기록은 『태종실록』 17년(1417) 5월, “조운 시 관용 물건을 남용한 어란량 수군 만호 송안(宋安)을 파직”하라는 것이 처음이다. 그런데 당시 어란진은 지금의 송지면의 어란리에 없었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1432]에 의하면, “삼촌포[화산면 연곡, 읍에서 9.82㎞(25리)]가 어란포였다. 당시 어란 만호진에는 중선 4척과 군사 480명, 뱃사공 4명이 있었다.” 이는 1412년 삼산면 계동으로 이동된 해진군의 읍치를 방어하기 위하여 화산 연곡에 어란진을 설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 어란의 서쪽 바다를 어란량이라 했는데, 이곳은 나주에서 출발한 제주배가 지나가는 길이었다.
『고려사(高麗史)』 탐라현 조에 의하면, 제주 가는 세 가지 뱃길 중 하나가 어란량을 거치고 있었다. “나주(羅州)에서 출발하여 직행으로 무안군 대굴포(務安大堀浦), 영암군 화무지와도(靈巖火無只瓦島), 해남현 어란량(海南於蘭梁)을 거쳐 7주야 만에 추자도에 도착하게 된다.” 이때 어란량은 세종 때이므로 송지면 어란이 아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도 해남현의 남쪽 9.82㎞[25리]에 어란이 있다고 하므로 화산면 연곡 삼촌포가 분명하다.
[변천]
해남 화산면 삼촌포에 있던 어란진은 섬으로 이동한다. 세종 당시 진도가 보이는 삼내도로 옮겨야 한다는 이길배의 상소 이후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1481~1530],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1656] 등에서 “어란포영은 해남현 남쪽 34리에 있다.”라고 확인된다. 18세기 초반 지도인 「호남우도」에 섬인 어란도가 등장할 뿐만 아니라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1736~1806]과 『대동 지지(大東地志)』[1864]에서 ‘어란도 폐영’이라 하고 있어 섬에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곳은 거리 등으로 보아 화산면 삼마도가 유력하다.
다시 섬에서 송지면[당시 영암군]으로 이동한다. 『여지도서(輿地圖書)』[1757] 영암군 조에서 확인된다. “군[영암읍]의 남쪽 150리[58.9㎞]에 있고 석성이 있다.”라는 기록을 참조하면, 1656년부터 1757년 사이에 해남현 화산면 인근의 섬에서 영암군역인 송지면 어란으로 이속됐음을 알 수 있다. 『영암읍지』도 어란포진이 해남현에서 영암군으로 이속되었다고 전한다. 한편 어란 수군진은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강압에 의해 1895년에 폐진되었다.
[의의와 평가]
조선 시대의 해양 방어 체제를 살펴볼 수 있는 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