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4004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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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朝鮮時代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남도 영암군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이은정 |
[정의]
1392년부터 1910년까지 조선 왕조 시기의 전라남도 영암 지역의 역사와 문화.
[개설]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전환은 단순한 왕조 교체의 의미뿐만 아니라 정치·경제·사회·사상 등 모든 면에서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이는 중세 사회에서 근세 사회로의 전환을 뜻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행정 편제, 인구와 성씨, 교통·통신, 경제 등으로 구분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행정 편제]
조선 초기 영암 지역의 행정 편제를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통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지역이 영암의 관할 아래 있었다. 백제 월내군(月奈郡) 이래의 영암 본 지역, 백제 고미현(古彌縣) 이래의 곤미(昆湄) 지역(地域), 향(鄕)으로 북평향(北平鄕), 부곡(部曲)으로 송지부곡, 월경처(越境處)로 강진의 무위동(無爲洞)·월남동(月南洞)·구은촌(仇隱村)·좌곡리(佐谷里)·상곡리(上谷里), 해남의 비곡(比谷)·별진(別珍)·북구미(北仇未)·묵산(墨山)·구산(拘山)·안복(安福)·가차양(加次良)·물야지(勿也只) 등이다.
현재의 영암 지역인 금정·신북·시종 지역은 나주 혹은 진도의 땅으로 구한말까지 존속하였다. 그리고 현재의 영암 관내가 아닌 지역으로서 영암에 속했던 곳으로는 해남의 송지면·북일면·북평면·계곡면·옥천면 일부와 강진의 성전면 일부, 완도의 일부가 월경지로 속해 있다. 결국 이 초기의 영역은 구한말까지 거의 변함없이 존속되었다. 현재와 같은 영암 지역으로 탈바꿈 되는 것은 1895년(고종 32)의 행정 제도 개편을 통해서였다.
즉 1895년 소모도를 완도군에 이속시킴과 동시에 나주군에 속했던 금마, 원정면, 비음면, 종남면, 진도군의 명산면을 편입하였다. 그 후 1914년에는 해남 지역에 있던 옥천시면, 옥천종면, 북평시면, 북평종면, 송지시면, 송지종면을 해남군에 넘겨주었고, 나주군 세화면의 임천리와 황계리, 반남면의 하촌, 성덕리를 병합하였다. 이로써 영암군은 영암면·북일시면·북일종면·시종면·군서면·곤일시면·곤일종면·곤이시면·곤이종면·금정면·신북면의 11개면 121개리로 개편되었다. 1917년부터 1932년 사이에 면의 옛 이름이 고쳐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79년 4월 7일에 영암면이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이로서 현재의 1개 읍, 10개 면이 확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인구와 성씨]
조선 왕조가 들어선 이후 역대 임금의 최대 관심사는 인적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호구를 어떻게 파악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영암 지역의 인구는 『세종실록지리지』[1423년]에 333호, 1,229명으로 나타나 있으며 조선 후기의 기록인 『호구 총수』[1789년]에는 원호(元戶) 8,214호, 인구 2만 9288명(남자 1만 3985명, 여 1만 5303명)으로 나타난다. 『호구 총수』에 기록된 리(里)의 수가 636리로 나타나는데 이로 미루어 1700년대 후반에는 한 리에 평균 46명 정도가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조선 시대 영암 지역의 세거 성씨를 보면, 『세종실록지리지』·『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토성(土姓)은 6성으로 최·박·주·백·혜·육이며, 곤미현은 허·유·배·전·종씨이다. 황원현은 황·윤·손·갈씨, 옥천현은 전·윤·신·안·박씨, 북평현은 조씨, 송지현은 김·전씨, 회의현과 심정현은 전씨, 진남현은 전씨, 망성(亡姓)은 오씨이다.
조선 후기의 지리서인 『여지 도서』에는 낭주 최씨(朗州崔氏), 함양 박씨(咸陽朴氏), 진주 주씨(晉州周氏), 수원 백씨(水原白氏), 옥천 육씨(沃川陸氏), 양천 허씨(陽川許氏), 대구 배씨(大丘裵氏), 문화 유씨(文化柳氏), 동복 오씨(同福吳氏), 창녕 조씨(昌寧曹氏), 김해 김씨(金海金氏), 천안 전씨(天安全氏)로 정리되어 있다.
[교통·통신]
1. 역원
조선 시대의 역은 중앙의 통치력이 지방에 효율적으로 미치게 하는 시설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교통·통신 수단으로서 공무 연락·군사 통신·조세 운반의 기능을 발휘하였던 역은 중앙에서 지방에 이르는 주요 도로에 설치되어 있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나타난 전라도에 설치된 역으로 창활도, 앵곡도, 제원도, 벽사도, 삼례도, 청암도, 경양도 등의 7개의 주역과 50개의 소속역이 있었다. 『경국대전』에는 삼례도, 오수도, 청암도, 경양도, 벽사도, 제원도의 6개 주역과 53개의 소속역이 있었음이 나타난다. 영암에 자리하고 있던 영보역은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장흥에 소재하고 있던 벽사도 소속이었고 『경국대전』이 완성된 1485년 이후에는 나주에 소재한 청암도 소속역이었다. 영암에는 역 외에 3개의 원(院)이 설치되어 있었다. 영암 지역의 원으로는 청풍원(淸風院)·보견원(普堅院)·도원(道院)이 있었다. 원은 공무 여행자의 숙식을 위해 각 요로에 설치된 공공시설로서 대략 30리의 간력을 두고 설치되었는데 교통 편의의 제공 외에 빈민을 구제하고 백성을 진휼하는 기능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2. 조운
교통·통신 수단으로서 중앙과 지방의 상호 연결 고리 역할을 하였던 역에 비해 현물의 세금을 선박으로 서울로 운송하여 국가의 재정을 충당케 하였던 것이 조운이었다. 고려 초 전국에 12조창이 있었는데 전라도 지역 6곳에 조창이 설치되어 있었고, 현재 전라남도 지역에 4곳의 조창이 설치되어 있었다. 나주의 해릉창, 영광의 부용창, 승주의 해룡창, 영암에 장흥창[조동포]이 설치되어 있었다. 수송의 편리함 때문에 조운에 있어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영암 조동포에 자리하고 있던 장흥창은 고려 말에 왜구의 노략질로 인하여 폐쇄당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 9조창으로 정비되고, 이때 영암의 장흥창은 폐쇄되었다. 이에 영암 지역의 조세는 예컨대 중종 대에 이르러서는 영광의 법성창에서 수합되어 서울의 경창으로 수송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통신에 있어 봉수 제도를 빼놓을 수 없지만 영암은 행정 영역이 자주 변경되어서 본래 영암에 속했던 달마산 봉수가 해남군으로 이속되어 현재의 행정 구역상으로 보아 영암군 지역에는 봉수가 없다.
[경제]
1. 농업과 목축
전라도 지역은 영산강과 만경강 유역의 비옥한 평야 지역을 가지고 있어 예로부터 중요한 농업 생산지였다. 조선 초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영암의 경지 면적은 간전(墾田)이 6,054결로 수전(水田)의 비율이 5/9였다. 주요 산물은 오곡 외에 삼, 닥나무, 감, 밤, 석류, 와골 등이 있었다. 국가에서 운영하는 영암 지역의 목장은 『세종실록지리지』에 노량(露梁) 말 139필과 임치도(臨緇島) 소 221수가 있다.
2. 수공업과 상업
조선 시대에는 상공업을 말업(末業)이라 하여 상공업을 억제하는 정책을 고수하였다. 농민의 부업인 수공업 이외의 전문적인 수공업자를 장인이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관장과 사장이 있다. 영암군 지역에는 15명이 있었는데, 야장(冶匠) 1명, 궁인(弓人) 1명, 시인(矢人) 1명, 지장(紙匠) 4명, 석장(席匠) 1명, 목장(木匠) 1명, 피장(皮匠) 1명, 칠장(漆匠) 1명, 사기장(沙器匠) 3명, 유구장(油具匠) 1명 등이 있다. 한편 자기소와 도기소를 두어 자기와 도기를 생산하고 있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영암의 자기소는 다점리(多岾里)에 2개가 있었는데 중급품을 생산했다. 도기소는 율점(栗岾)에 2개가 있었는데 하급품을 생산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향촌에서 장시가 발전하였다. 영암 지역의 장시는 동문외(東門外), 독천, 쌍교(雙橋), 송지, 읍내, 덕진 시장이 있다. 19세기 초에 유통되고 있는 상품은 면화, 과물(果物), 죽물(竹物), 쌀 등이었다.
3. 염업과 수산업
영암 지역의 염소(鹽所) 3개소 염간(鹽干) 38명의 공납액은 약 4만 2180㎏[370석]이었다. 『세종실록지리지』 지리지에는 영암 지방의 어류로 숭어, 패조류로 전복, 해조류로 미역과 김이 어획되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어류로 숭어, 패조류로 굴·전복·홍합·조, 해조류로 감태·김·미역, 기타 수산물로 새우·낙지·게 등이 어획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외적의 침입]
1. 을묘왜변
전라남도 해안은 지리적 특성 때문에 항상 왜구에게 시달려 왔다. 을묘왜변은 삼포왜란 이래 일본에 대한 세견선에 고난을 받아온 왜구들이 1555년(명종 10) 5월에 배 70여 척을 이끌고 먼저 영암의 달량진을 점령하면서 발생한 커다란 왜변이었다.
당시 달량진성은 왜구에 의해 여러 겹으로 포위당하였다. 병사 원적과 군졸은 용감히 성위에서 활로 왜구에게 대항하였으나 패하고 말았다. 이후 달량진을 점령한 왜구는 어란진, 장흥, 강진, 진도 일대를 휩쓸며 약탈과 노략질을 일삼았다. 이때 왜구를 물리치고 영암성을 다시 수복하는 데 양달수, 양달사 형제의 공로가 컸다. 이후 왜구는 5월 25일 영암 전투를 고비로 자진해서 물러났다.
2. 임진왜란
16세기에 들어서면서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고 국방력이 점차 약화되어, 중종 때의 구포 왜란을 비롯해 삼랑진 왜변, 을묘왜변 등 왜구의 소란이 자주 일어났다. 이 무렵 일본에서는 장기간에 걸친 전국 시대의 내란을 안정시키기 위해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불평 세력의 관심을 밖으로 쏠리게 하는 정책을 썼고 임진왜란은 이 때문에 발발하게 되었다. 임진왜란 초기에 전라도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이 일본군의 침해를 받은 상황에서 호남은 자연스럽게 국력 회복의 기초가 되었다.
해안을 접하고 있는 영암은 향병을 중심으로 향읍 방위전에 주력하고 있었다. 특히 정유재란을 전후한 시기에 전라도 의병은 대체로 해안이나 하천 혹은 산간의 요충지를 이용한 게릴라전을 많이 하였다. 이 같은 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한 의병 활동은 국가적 통제나 지원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한정된 지역에서 동원, 혹은 자진해온 향민들이 유능한 장수의 휘하에 결집된 전력으로 스스로 전개한 의병 활동이었다. 임진왜란 중 각 의병장 막하에서 순절한 이 지역의 의병들의 활동은 『호남절의록』과 『충의사록』 등 여러 기록에 나타난다. 이들 기록을 통하여 확인되는 영암 지방의 인물은 다음과 같다. 고경명 막하에 전몽성, 박대기, 박장원, 박승원 등, 김천일 막하에 박흡, 최희민, 충무공 이순신 막하에 정운을 비롯한 여러 인물들이 확인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