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4004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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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開港期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남도 영암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정윤미 |
[정의]
1876년부터 1910년까지 전라남도 영암 지역의 역사.
[개설]
개항기는 일반적으로 1876년 조일 수호 조규(朝日修好條規)가 일본의 강압에 의해 체결된 이후 1910년 식민 통치 체제로 전환되는 시기까지를 통칭한다. 사회적으로는 근대문물의 유입과 수용을 통해 기존의 봉건적인 지배 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근대체제로 변화되어 가는 상황이다. 1876년 부산항이 개항된 이후 각 나라와도 잇달아 통상 조약이 맺어졌고, 외국의 선진 문명과 근대 문물이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개항기 동안 새로운 근대 문물의 수용과 근대적인 제도 개선 등을 위한 노력들이 이루어졌으나, 조선 시대가 지닌 구체제의 모순들이 혁파되지 못했고, 외세의 압박을 이겨낼 만한 자구책 마련이 부족하여 결국 식민지 체제를 경험하게 되었다. 영암을 비롯하여 전라남도의 경우는 1897년 목포가 부산, 원산, 인천에 이어 국내 4번째로 통상항으로 개항되면서 본격적으로 근대문화와의 접촉이 이루어졌다.
[행정구역]
1896년 도서 지역으로 신설된 완도군에 그동안 영암에 속해 있던 보길도·추자도가 이관되었고, 북평면·송지면 등은 해남군에 편제되었다. 대신 나주에 속했던 시종면·신북면 일부와 금정면이 영암군으로 편입되었다. 1901년 군시면과 군종면을 합하여 영암면으로 개칭되었고, 영암면사무소가 설치되었다. 1914년에는 해남과 강진 지역에 있던 월경지가 해당 군현에 이관되었다. 이후 일제 강점기 일부 면의 통합과 명칭 변경을 거쳐 11개면으로 정리되었다.
[사회]
1894년 동학농민군이 전국적으로 봉기했을 때 영암 지역에서는 신성(申聖)·신란(申闌)·최영기(崔永其) 등이 장령급으로 참여하였다. 일본의 한반도 침략이 심화되자 영암 지역도 이에 저항하는 항일 운동이 발생하였으며, 신예교·박사화·추기엽·나성화·김치홍 등이 의병 활동을 통해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영암군은 전라남도 중부 서해안에 임하고 서쪽은 목포항과 마주보고 있다. 목포가 개항된 이후 선박을 통해 해상 교류가 활발하였고, 항일운동가 조극환의 경우처럼 목포로 거주지를 옮겨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영암읍의 북서쪽으로 1리쯤 떨어진 해창에서는 목포항까지 매일 발동기선이 다녔는데, 이러한 해로를 통한 교류 관계의 발전으로 목포를 통한 근대 문화의 유입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육상 교통로의 경우는 강진군 병영 및 장흥 지역과의 교류를 통해 화물과 사람의 왕래가 편리해졌으며, 군세가 날로 번창하였다. 영암 지역은 땅이 농작에 적당하여 농업이 발달하였으며, 목포 개항 이후 고하도에서 육지면(陸地棉) 재배가 성공된 이후 영암 지역에서도 1906년부터 육지면을 재배하기 시작하였다.
[문화]
1907년에 근대적인 우편 제도가 보급되어 영암 지역에도 영암 우체국이 처음 설치되었고, 1908년에는 근대적인 교육기관으로 영암 공립 보통학교가 설립되었다. 이 시기 가야금 산조를 창시하여 민족 음악을 발전시킨 김창조가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그 제자 가운데 한성기·김죽파·김병호 등의 명인들이 배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