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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농민 운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400493
한자 東學農民運動
이칭/별칭 갑오농민전쟁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남도 영암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이기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단 시기/일시 1894년 1월 - 고부 민란 발생
발생|시작 시기/일시 1894년 3월 - 동학 농민 운동 봉기
전개 시기/일시 1894년 5월 - 전주 화약 체결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94년 6월 21일 - 일본군의 경복궁 침범
전개 시기/일시 1894년 9월 - 동학 농민 운동 제2차 봉기
종결 시기/일시 1894년 11월 - 동학 농민 운동 우금치 전투 패배로 종결
성격 농민 운동

[정의]

1894년 전라남도 영암군 일대에서 전봉준 등 동학 지도자들이 주도하여 일으킨 반제 반봉건 농민 운동.

[개설]

동학 농민 운동 은 1894년(고종 31) 1월 발생한 고부 민란 이후 전봉준 등이 3월 무장현에서 본격적으로 민중의 호응을 촉구하며 봉기를 일으킴으로써 시작되었다. 그해가 60갑자 중 갑오년이었기에 갑오농민전쟁이라고도 부른다.

당시 농민군은 관군을 연달아 격파하며 전주성까지 점령하고 나서는 전주화약(全州和約)을 체결하고 해산하였다. 그 대신에 농민군은 각 군현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개혁 활동을 펼쳤다.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새 정권을 수립하자 농민군은 다시 봉기하였으나 우금치 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패하고 논산·원평 등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도 잇달아 패하며 모두 흩어지고 지도자들도 체포되었다.

[역사적 배경]

지주제가 발달한 곡창 지역인 호남 지방의 농민은 과도한 세금과 부패한 관료들의 수탈에 시달리고 있었다. 게다가 일본으로 쌀이 수출되면서 더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에 따라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평등사상을 교리로 하는 동학의 교세가 더욱 급격히 확장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봉기도 급속히 퍼져 나갈 수 있었다.

[경과]

영암은 무안이나 영광처럼 동학의 세가 크지는 않았지만 1893년의 보은 집회에도 약 40여 명이 참가했으며 1894년 동학의 조직인 포(包)를 중심으로 고창의 무장에서 일으킨 봉기인 ‘무장기포’ 당시에도 신란(申欄)·최영기(崔永基) 등이 참여하였다. 이들은 농민군의 전투에 계속 참가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전주화약 이후 영암에 집강소를 설치하는 주체가 되었을 것인데, 영암 집강소의 구체적인 활동상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농민군의 제2차 봉기 기간 중 장흥에 모여 있던 농민군들은 영암읍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나주의 수성군 병력이 출동하자 더는 공격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결과]

영암의 관군은 농민군이 물러나자 1894년 12월 15일 농민군 지도자 주성빈(朱成彬)·강군오(姜君五)·김순범(金順凡)·정용달(鄭用達)·김순천(金順天)·김권서(金權西)·박맹용(朴孟用)을 체포하여 처형하였다. 또 12월 28일에는 최영기(崔永基)와 양씨아시(梁氏阿時) 두 사람이 체포되어 처형됨으로써 영암의 동학 농민군은 사라지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동학 농민 운동 은 제국주의 세력의 개입으로 많은 희생을 치르며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농민 스스로 사회적 개혁을 요구할 뿐 아니라 실제 실천으로 옮기려 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경험이 되었다.

[참고문헌]
  • 이상식·박맹수·홍영기, 『전남 동학 농민 혁명사』(전라남도, 1996)
  • 동학 농민 혁명 기념관(http://www.donghak.go.kr)
  • 영암군(http://www.yeongam.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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