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4005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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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四一九革命 |
이칭/별칭 | 4월 혁명,미완의 혁명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전라남도 영암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기훈 |
[정의]
1960년 4월 19일을 전후로 전라남도 영암군을 포함한 전국에서 전개된 민주주의 혁명 운동.
[개설]
1960년 4월,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이 저지른 3·15 부정 선거에 항의하여 발생한 학생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지속되어 이승만 정권을 붕괴시키고 제2 공화국을 출범하게 한 혁명이다.
1960년 3·15 부정 선거에 대한 저항은 선거 직후부터 시작되었다. 특히 마산에서 부정 선거 항의 시위 중 실종된 김주열(金朱烈)이 최루탄에 맞은 시신으로 발견된 이후 국민의 대중적인 분노는 더욱 확산되었다. 4월 18일에는 고려 대학교 학생들이 시위를 마치고 귀가하다가 경찰의 비호를 받는 정치 깡패들에게 습격받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튿날인 4월 19일에는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서 대규모 학생 시위가 발생하였다.
전라남도 영암군에서도 영암읍과 구림리에서 많은 학생이 부정 선거 규탄 시위를 벌였으며, 서울에서 시위에 참가한 영암 출신 젊은이들도 많았다.
[역사적 배경]
1950년대 자유당 정권은 ‘발췌 개헌’, ‘사사오입 개헌’ 등으로 이승만의 영구 집권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부정부패와 정책 실패로 자유당에 대한 지지가 갈수록 떨어지고 1956년 선거에서 이승만이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부통령에 민주당의 장면(張勉)이 당선되자, 1960년 3·15 선거에서 대규모 선거 부정을 저질렀다.
선거 당일부터 마산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부정 선거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졌지만 이승만 정부는 오히려 간첩의 소행이라며 물리력을 동원하여 탄압하였다. 마산 시위 도중 실종되었던 고등학생 김주열이 4월 11일 얼굴에 최루탄이 박힌 시신으로 마산 중앙 부두 앞바다에서 발견된 이후, 마산에서 다시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였으며 저항이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경과]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서울 시내에서 시위를 벌였으며 이튿날인 4월 19일에는 서울특별시 시내 대학과 고등학교의 학생들, 그리고 시민들까지 합세한 시위가 벌어졌다. 전라남도 광주시[지금은 광주광역시]에서도 고등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대학생과 시민들이 참가한 규탄 시위가 낮부터 밤늦게까지 일어났다. 전국적으로 주요 도시에서 수천 명의 학생과 시민이 시위에 참여하자, 몇몇 도시에는 계엄령이 내려졌고 시위 진압에 나선 경찰이 시위대에 무차별로 발포하여 사상자가 속출하였다.
영암 지역에서도 영암 중·고등학교 학생회 간부들이 부정 선거 이후 항의 시위를 조직하려 하였으나 경찰의 감시와 교사들의 설득으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광주에서 시위 소식이 전하여지자 영암에서도 4월 19일 오후에 영암 읍내에서 시위를 벌였으며 낭주 중학교[지금의 영암 낭주 중학교] 학생들도 시위에 나섰다. 한편 영암 출신의 장기수·손조남은 서울에서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목숨을 잃기도 하였다.
[결과]
시위가 더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고 미국도 지지를 철회하자 4월 26일 이승만은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허정(許政) 과도 정부가 수립되었다. 국회는 6월 헌법을 개정하고 7월 29일 총선거를 실시하였다. 이에 1960년 8월 민주당의 장면을 총리로 하는 내각이 출범하였다.
[의의와 평가]
4·19 혁명 은 단일한 정치적 세력이 계획적으로 주도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성향의 학생·시민이 일시적으로 힘을 합쳐 진행한, 즉흥적 성격이 강한 혁명이었다. 그랬기에 이승만 정권의 독재를 무너뜨리고 나서는 혁명 정신, 곧 ‘민주주의의 완성’을 위하여 이어져야 할 후속 과업이 혁명 주체의 불명확성 등을 이유로 흐지부지 중단되고 말았다. 그래서 4·19 혁명은 ‘미완의 혁명’이라고 불린다.
이렇듯 한계가 분명하지만 4·19 혁명은 민주주의가 한국 사회의 보편적 가치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 준다. 또 시민의 직접적 행동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을 막아 낸 역사적 사건으로, 한국 민주주의 발전의 중요한 계기이자 역사적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