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4009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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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慶昌 |
이칭/별칭 | 가운(嘉運),고죽(孤竹),최선(崔仙)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남도 영암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강욱 |
출생 시기/일시 | 1539년 - 최경창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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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68년 - 최경창 증광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575년 - 최경창 사간원 정언에 임명됨 |
활동 시기/일시 | 1576년 - 최경창 영광 군수로 좌천 |
활동 시기/일시 | 1582년 - 최경창 성균관 직강으로 좌천 |
몰년 시기/일시 | 1583년 - 최경창 사망 |
출생지 | 최경창 출생지 -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구림리 |
묘소|단소 | 최경창 묘소 -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다율리 |
사당|배향지 | 서봉 서원 - 전라남도 강진군 작천면 현산리 |
성격 | 문인|시인 |
성별 | 남 |
본관 | 해주 |
대표 관직|경력 | 사간원 정언|영광 군수|성균관 직강 |
[정의]
조선 전기 영암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해주(海州)이며, 자는 가운(嘉運), 호는 고죽(孤竹)이다. 아버지는 평안도 병마절도사, 영변대도호부사(寧邊大都護府使)를 역임한 최수인(崔守仁)이다. 아들은 충청도 병마절도사를 지낸 최운서(崔雲瑞), 최구서(崔龜瑞), 최인서(崔麟瑞)이다.
[활동 사항]
최경창(崔慶昌)[1539년~1583년]은 학문과 문장에 능하여 백광훈(白光勳)[1537~1582], 이달(李達)[1539~1618]과 더불어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불렸는데, 그 중 최경창은 좌장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최경창은 1568년(선조 1)에 증광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북평사(北評事)[조선 시대 함경도에 있는 북병영에 속한 정육품 무관]가 되었으며, 예조·병조의 원외랑(員外郎)을 거쳐 1575년(선조 8)에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올랐으나 1576년(선조 9) 영광 군수로 좌천됐다. 이때 뜻밖의 발령에 충격을 받고 사직한 뒤 가난에 시달렸다. 1582년(선조 16) 종성 부사에 특수(特授)되었으나 북평사의 참소로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으로 좌천되었다. 1583년 발령을 받고 한양으로 향하다 경성 객관(鏡城客館)에서 객사하였다.
[학문과 저술]
최경창의 시 세계는 청경(淸勁)·한경(悍剄)하다는 평을 받았다. 율곡(栗谷) 이이(李珥)는 최경창의 시를 청신준일(淸新俊逸)[새롭고 산뜻하여 재능이 뛰어남]로 평한 바 있다. 대표적인 저서로 『고죽 유고(孤竹遺稿)』가 있다. 또한 조선조 여인의 한(恨)을 전형적으로 표출한 「이소부사(李少婦詞)」, 사랑하는 여인의 정감의 세계를 그려낸 「번방곡(飜方曲)」이 전해져 오고 있다. 이외에도 「영월루(映月樓)」, 「대은암(大隱巖)」, 「증승(贈僧)」 등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이산해(李山海) 등이 최경창을 최선(崔仙)이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신비스런 면모를 많이 지니고 있었던 듯한데, 을묘왜란 때 최경창이 퉁소 한 곡조를 구슬프게 불어 영암에 침입한 왜구를 향수에 젖게 하여 물리쳤다는 일화도 전한다. 뿐만 아니라 무예에도 뛰어나 “활 솜씨는 이의 심장을 나누고 새의 왼쪽을 맞출 정도”였다고 한다.
최경창은 학문과 문장에 능하여 이이·송익필(宋翼弼)·최립(崔岦) 등과 서로 시를 주고받았으며, 정철(鄭澈)·서익(徐益) 등과도 교류하였다.
[묘소]
최경창의 묘는 경기도 파주군 교하읍 다율리에 있는데 부부 합장묘이며, 묘 앞에는 명기 홍랑(洪娘)의 묘가 위치하고 있다.
[상훈과 추모]
숙종 때 청백리에 녹선(錄選)되고 1723년에 전라남도 강진군의 서봉 서원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