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4004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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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乙卯倭變 |
이칭/별칭 | 달량진 사변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전라남도 영암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변남주 |
[정의]
1555년 왜구가 달량진으로 상륙하여 지금의 전라남도 영암을 비롯한 해남, 진도, 장흥 일대를 침탈한 사건.
[개설]
을묘왜변(乙卯倭變) 은 달량진 사변(達梁鎭事變)이라고도 하는데, 1555년(명종 10) 5월 11일에 시작되었다. 서남해안 지역으로 한정되었으나 거의 전쟁 수준으로 전개되었다. 왜선이 70여 척, 왜구가 6천 명에 이르렀고, 달량을 침범한 후 강진·장흥·완도·진도·영암 등을 분탕질하였다. 서남해안을 장악한 왜구가 서울까지 쳐들어간다는 말에 조정이 발칵 뒤집혔을 정도였다. 이처럼 달량진 사변은 대규모였기에 임진왜란의 전초전이라 칭하기도 한다.
[역사적 배경]
1510년 삼포 왜란(三浦倭亂) 이후 조선 정부는 임신약조, 정미약조 등으로 왜구와의 무역을 강력히 통제하기 시작하였고 일본에 대한 무역선인 세견선을 감축하면서 교역량도 줄어들었다. 이에 일본은 불만을 품게 되었고 일본 내의 정세도 안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게 된 대마도(對馬島) 등 일본의 서부 지방에 사는 바닷가 주민들이 1555년에 해로의 요충지였던 달량진을 통하여 서남해안 지역을 침탈하였다.
[경과]
달량진의 앞바다에 도착한 왜선은 70여 척에 왜구는 6천여 명에 달했다. 왜구들은 주변 상황을 염탐한 후 열한 척의 배를 이진포와 달량포에 먼저 상륙시킨 후 성 아래의 민가를 불태우고 성을 포위하였다. 달량진을 지키고 있던 병사는 완도의 가리포로, 종4품 만호진(萬戶鎭)이 종9품의 권관진(權官鎭)으로 축소되어 있었으므로 병사는 고작 40여 명에 불과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완도 가리포의 수군 첨사였던 이세린(李世麟)은 성을 버리고 10리 밖 굴속에 숨어 버렸다. 이세린은 군량미 100석을 배에 싣고 도망하려다 이마저도 적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달량진 사변의 급보를 접한 강진병영의 절도사 원적(元績)은 군사 200여 명과 장흥 부사 한온(韓蘊), 영암 군수 이덕견(李德堅)과 함께 급히 달려오지만 참패하였다. 당초에 왜선 60여 척이 전라도 달량진 어귀에 정박하자, 절도사 원적이 군사 2백여 명을 거느리고 장흥 부사 한온, 영암 군수 이덕견과 함께 구원하러 들어갔는데, 왜적들이 잠시 도망하자 원적이 성안으로 들어가 방어하였다. 왜적들의 무리가 다시 몰려와 성을 포위한 지 사흘이 되어도 구원할 군사는 오지 않고 양식도 다 떨어져 가므로, 원적은 군사로 하여금 성에 올라가 화친을 청하게 하였다. 왜인들이 성안에 화살이 다 떨어지고 힘도 다한 것을 알아차리고서 사다리를 타고 성으로 올라와 성이 함락되었다.
원적과 한온 등 모든 군사가 살해되고 항복한 이덕견을 통하여 왜구는 “한양까지 범하겠다.”라는 편지를 서울로 보내자 조정은 대혼란에 빠지고 만다. 게다가 전라 우수사 김빈(金贇)과 광주 목사 이희손(李希孫), 해남 현감 변협(邊協) 등이 뒤늦게 구원하러 오지만 모두 연패하고 만다. 이렇게 거듭된 패전 소식에도 조정의 대신들은 아무도 방책을 내놓지 못했다.
이 와중에 승세를 탄 적들은 진도의 남도포와 금갑포, 완도의 가리포, 강진의 마도진, 장흥의 회령포 외에 전라병영과 강진, 장흥 등을 분탕질했다. 해남읍성의 변협은 수성에 성공했지만 다른 지역의 장수들은 성안에서 원적이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성을 버리고 도주해 버렸다. 마을마다 들어온 왜적이 겨우 서너 명이었음에도, 대항하는 사람이 없어 바닷가의 진(鎭)과 고을들은 모두 텅 비어 버렸다. 왜구들은 무인지경이 된 관아와 민가에 불을 질러 서남해안은 한순간에 화염으로 뒤덮였고 군량과 무기 등을 모조리 약탈당하였다. 왜구들은 마구잡이로 약탈한 재물을 소와 말에 나누어 싣고 영암 향교에 들어가 진을 쳤다.
이에 조선 조정에서는 호조판서 이준경(李浚慶)을 도순찰사, 김경석(金景錫)·남치훈(南致勳)을 방어사(防禦使)로 임명하여 왜구 토벌에 나섰다. 그러나 전라 방어사 김경석(金景錫)은 영암읍성에서 잠자코 사태를 지켜보기만 하였고 전주 부윤 이윤경(李潤慶)이 싸움에 나서기를 요청해도 꿈쩍하지 않았다. 이에 분개한 군사들은 전주 부윤 이윤경의 지시에 따라 결전에 임하여 적의 머리 100여 급을 베는 등 적을 무찔렀다. 비로소 왜적은 군량과 재물을 버리고 도망치면서 강진 지역을 분탕질한 후 바다로 나가면서 달량진 왜변은 끝이 난다.
[결과]
이후에 조선 조정은 무역 통제를 더욱 강화하면서 강경책을 썼다. 그러자 그해 10월에 대마도의 도주는 을묘왜변에 가담한 왜구들의 목을 베어 보내어 사죄하고 세견선의 부활을 거듭 요청하였다. 조정에서는 이를 받아들여 세견선 다섯 척을 허락하였다.
[의의와 평가]
을묘왜변 을 통하여 당시 왜구에 대한 정책을 알 수 있다. 당시 조선은 해양 방어 체제에 소홀하다가 왜구에 속수무책으로 당했음에도, 이후에도 아무런 왜구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결국 이는 임진왜란을 맞게 되는 결과로 이어지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