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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화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401032
한자 朴士化
이칭/별칭 박사과(朴士過),박사홍(朴士弘)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전라남도 영암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정윤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0년연표보기 - 박사화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08년 2월 - 박사화 심남일 의병 부대에 참가하여 중군장으로 활약
활동 시기/일시 1910년 5월 19일 - 박사화 광주 지방 법원에서 내란 및 살인죄로 사형을 언도받음
몰년 시기/일시 1912년 7월 5일연표보기 - 박사화 순국
추모 시기/일시 1998년연표보기 - 박사화 건국 훈장 독립장 추서
성격 의병
성별

[정의]

개항기 전라남도 일대에서 활동한 의병장.

[개설]

박사화(朴士化)[1880~1912]의 본적은 전라남도 나주 지량(知良) 기촌(基村)이고, 의병 활동 당시 주소지는 나주 전왕(田旺)이었다. 전라남도 함평에서 의거한 심남일(沈南一) 의병 부대에 합류하여 의병 활동을 벌이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1912년 순국하였다. 박사과(朴士過), 박사홍(朴士弘)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하였다.

[활동 사항]

박사화는 1908년 2월 심남일 의병 부대에 합류하여 활약하였다. 심남일 의병 부대는 1908년 3월 강진(康津)에서 일본군 수백 명과 오전 6시부터 밤 10시까지 접전을 벌여, 수십 명을 살상하고 다수의 무기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리며 기세를 떨쳤다. 이후 남평, 능주, 영암, 나주, 장흥, 해남 등지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그 밖에도 전라남도 각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고 친일 밀정과 관료들을 처단하는 등 1909년 가을까지 전라남도 나주, 영산포, 영암 등지에서 15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일본군과 의병 전투를 전개하였다.

박사화가 활발한 의병 활동을 벌이던 1909년에 일제는 한반도 병합을 목전에 두고 ‘남한 대토벌 작전(南韓大討伐作戰)’을 전개해 호남 지역 의병들에 대한 강력한 공세를 가했다. 이 때문에 부대의 상황이 점점 힘들어지자 박사화는 일본군 영산포 분대장 오하라[大原] 대위에게 회견을 요청하였고, 부하 150명의 구명을 위해 자수한 뒤 곧 탈출하여 의병 항쟁을 지속하다가 다시 체포되었다.

박사화는 1910년 5월 19일 광주 지방 법원에서 내란 및 살인죄로 사형을 언도받은 뒤, 1912년 7월 5일 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박사화의 공훈을 기려 1998년에 건국 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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