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4010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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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聖載 |
이칭/별칭 | 김학선(金學善),김학호(金鶴鎬)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남도 영암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정윤미 |
[정의]
개항기 전라남도 일대에서 활동한 의병.
[개설]
김성재(金聖載)[1877~1942]는 전라북도 순창(淳昌) 출신으로, 1907년부터 1910년 시기 전라남도 일대에서 심남일(沈南一) 의병 부대의 후군장(後軍將)으로 항일 투쟁에 앞장섰다. 김학선(金學善), 김학호(金鶴鎬)라는 이름을 쓰기도 하였다.
[활동 사항]
김성재는 1907년 11월 1일 전남 함평군 신광면에서 심남일이 의병을 일으키자 이에 참전하여 후군장으로 추대되었다. 이후 600여 명의 군세로 남평(南平)·강진(康津)·능주(陵州)·해남(海南)·보성(寶城)·장흥(長興) 등지에서 수차례에 걸쳐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1909년 5월 보성 창의장(倡義將) 안규홍(安圭洪) 부대와 석호산(石虎山)에서 회동하여 협동 작전을 논의할 때 강달주(姜達周) 등과 함께 소를 잡아 의병부대에 먹이는 등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우기도 하였다.
김성재는 1909년 7월 21일 영암군 금마면 고인동(古引洞)에서 고종 황제의 의병 해산 조칙(詔勅)에 따라 심남일 부대가 해산할 때 정읍군으로 피신하여, 1년 8개월 동안 활동을 지속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김성재의 공훈을 기려 1992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