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4010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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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辛禮敎 |
이칭/별칭 | 신재빈(辛在彬),남시(南市)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남도 영암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정윤미 |
활동 시기/일시 | 1907년 - 신예교 구국 결사대 조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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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908년 10월 27일 - 신예교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75년 5월 - 신예교 충렬비 건립 |
출생지 | 신예교 출생지 -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 운암리 169번지 송석정 |
성격 | 의병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구국 결사대 대장 |
[정의]
개항기 전라남도 영암 출신의 의병장.
[개설]
신예교(辛禮敎)[?~1908]는 영암군 덕진면 운암리 출신으로, 구국 결사대를 조직한 뒤 의병장으로 활약하다가 일본군과 교전 중에 순국하였다.
[가계]
본관은 영산(靈山), 호는 남시(南市)이고, 본명은 신재빈(辛在彬)이다. 신석황(辛錫璜)의 3남으로 태어났다.
[활동 사항]
신예교는 1902년 영암에 온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의 구국 강론(救國講論)을 듣고 큰 감명을 받아 의병 활동을 결심하게 되었으며, 1907년에 박사과(朴士果)·최장홍(崔章洪)·박연희(朴燃熙)·박한민(朴漢玟)·최기배(崔基培)·최영철(崔永喆)·하영선(河永先)·김상폭(金相瀑)·김덕겸(金德兼)·이창율(李昌律)·한동규(韓東圭) 등 40여 명을 규합해 구국 결사대를 조직하고 대장을 맡았다.
신예교가 이끈 구국 결사대는 이듬해인 1908년에 300명이 넘는 대부대로 발전하였고, 주로 전라남도 영암(靈岩)·능주(綾州)·나주(羅州)·장흥(長興)·강진(康津)·해남(海南) 등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며 많은 공을 세웠다.
신예교는 의병 활동을 치열하게 전개하던 1908년 10월 27일 능주 돌정리[石亭里]에서 일본 헌병대의 기습을 받아 결사대 전원과 함께 순국하였다. 당시 시신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여서 고향 뒷산에서 초혼장(招魂葬)을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75년 5월에 신예교 충렬비가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