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4016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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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茅山里- |
이칭/별칭 | 모산리 농악,모산리 풍물,모산리 마당밟이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놀이/놀이 |
지역 | 전라남도 영암군 신북면 모산리 |
집필자 | 송기태 |
놀이 장소 | 모산리 농악 - 전라남도 영암군 신북면 모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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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관 단체 | 모산리 당산 보존회 - 전라남도 영암군 신북면 모산리 |
성격 | 민속놀이 |
노는 시기 | 음력 1월 14일~1월 15일 |
관련 의례 행사 | 천신제|당산제 |
[정의]
전라남도 영암군 신북면 모산리에서 마을의 안녕과 평안을 기원하고, 풍요와 여흥을 위해 행하는 농악.
[개설]
영암군 신북면 모산리에서는 마을의 가장 큰 행사로 정월 대보름날에 천신제와 당산제를 지내고, 농악놀이를 한다.
[연원]
신북면 모산리는 행정 구역상 1구 산정 마을과 2구 구암 마을로 구분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마을로 농악을 비롯한 대부분의 행사를 함께 진행한다. 문화 유씨 집성촌으로 2013년 현재 170호에 330여명이 거주하고 있다.
모산리 매구 [농악]는 마을의 제의와 노동이 결합된 놀이로 전승되었다. 모산리 마을 사람들은 매년 대보름을 기해 천신제와 당산제를 지낼 때 반드시 농악을 쳐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농악이 왕성했던 시기는 40~50년 전인 1960년대~1970년대로, 당시에는 당산제를 마친 후 당산굿, 샘굿, 마당밟이를 진행했다. 또한 여름철 김매기를 마치면서 만드리굿을 쳤다.
[놀이 도구 및 장소]
모산리 농악의 악기와 치배[타악기를 치는 사람] 구성은 기수, 악기수, 잡색으로 구분된다. 기수가 들고 다니는 깃발은 용기, 농기, 단체기, 영기가 있다. 용기는 깃발에 용 그림이 그려진 것으로 2000년대 초에 다시 제작했다. 농기는 별도의 명칭은 없으나 깃발에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고 쓰여 있다. 단체기로는 ‘모산리 당산 보존회’의 깃발이 있다. 영기에는 ‘令’이라고 쓰여 있고, 4개가 제작되어 사용된다.
악기는 꽹과리, 징, 장구, 북, 소고가 사용된다. 꽹과리재비는 보통 3명 정도로 편성되고, 농악대 복장에 상모를 쓴다. 꽹과리재비를 제외한 악기수는 모두 농악대 복장에 고깔을 쓴다. 징재비 2명, 장구재비 3명, 북재비 4~5명, 소고 6~7명 정도로 구성된다.
잡색은 농악이 왕성하던 시기인 1960년대~1970년대에 편성했고, 배역으로는 포수, 양반, 각시, 조리중 등이 있었다. 포수는 포수 복장에 목총을 들었고, 양반은 갓을 쓰고 수염을 달았다. 각시는 남자가 치마저고리를 입고 여장을 했고, 조리중은 짚으로 엮은 모자를 썼다.
[놀이 방법]
모산리 농악은 정월 대보름의 천신제와 당산제에 결합되어 연행된다. 천신제는 정월 열 나흗날 밤 자정 무렵에 마을 뒷산 천신단에서 지내고, 당산제는 정월 대보름 새벽에 당산에서 지낸다. 천신제 제관이 마을로 내려오면 당산제 제관들이 바로 당산제를 지내는 것이다.
농악의 경우 천신제를 지내기 위해 산에 오르는 제관이 외롭지 않도록 소리를 내는 것이다. 그래서 제관이 천신단에 도착해서 천신제를 지내기 시작하면 농악을 그치고, 천신제를 마치면 다시 농악을 친다. 천신제를 마친 제관이 마을로 내려오고, 당산제 기간 동안 계속해서 농악을 친다. 당산제 기간에는 농악대의 영기 4개를 당산 주위에 세우고 금줄을 둘러친다.
지금은 전승이 중단되었지만, 과거에는 당산제를 지낸 다음날부터 이월 초하루까지 당산굿과 샘굿, 마당밟이 등을 진행했다. 마당밟이의 경우 2008년경까지 연행했고, 면소재지까지 걸궁을 가기도 했다.
또한 여름철에는 만드리굿이라고 하여 마지막 김매기 때 논에서부터 농악을 치고 들어와 부잣집 마당이나 공터에서 판굿을 쳤다.
[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신북면 모산리에서는 천신제와 당산제를 지낼 때 반드시 농악이 필요하다고 한다. 제관이 외롭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인데, 이는 근본적으로 농악 자체가 제의 음악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정월 대보름 당산제 때에는 객지에 나가 있던 사람들까지 참석해 200여명 정도 모이게 된다. 이때 농악을 통해 마을 사람들이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장을 마련한다.
과거에는 정월 대보름에 시작해서 이월 초하루까지 보름 동안 농악을 연행했다. 이 기간 동안 당산굿, 샘굿을 치면서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고, 마당밟이를 하여 각 가정의 액막이를 했다.
여름철의 경우 마지막 김매기 때에는 마을 사람들 전체가 참여하고, 마을의 부잣집에서 주민들에게 속옷 한 벌씩을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김매기를 마치면 일 년 농사에서 가장 힘든 시기를 마친 것이기 때문에 농악을 치면서 풍요를 기원하고 여흥을 즐겼다.
[현황]
정월 대보름의 당산제 때 치는 농악은 2013년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외부에서 농악 강사를 초빙하여 마을 청년들에게 농악을 가르쳐 천신제와 당산제를 지낼 때 농악대가 당산 앞마당에서 농악을 연행한다.
그러나 당산제 이후 보름날부터 시작하는 당산굿, 샘굿, 마당밟이 등은 전승이 중단되었고, 만드리굿도 1960년대에 중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