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5005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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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務安朴氏 |
영어공식명칭 | Muan-Park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창기 |
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 1445년 - 박지몽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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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 시기/일시 | 1470년경 - 박지몽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에 입향 |
본관 | 무안 - 전라남도 무안군 |
입향지 | 입향지 -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
세거|집성지 | 집성촌 -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원구리 |축산면 도곡리 |
묘소|세장지 | 박지몽 묘소 -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보림리 |
성씨 시조 | 박진승(朴進昇) |
입향 시조 | 박지몽(朴之蒙) |
[정의]
경상북도 영덕군에서 박진승을 시조로 하고 박지몽을 입향조로 하는 세거성씨.
[개설]
무안박씨(務安朴氏)는 박진승(朴進昇)[950~?]을 시조로 하고 박지몽(朴之蒙)[1445~?]을 입향조로 하는 성씨이다.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원구리와 축산면 도곡리, 창수면 갈천리·인천리·삼계리 등지에 세거하고 있다.
[연원]
무안박씨는 신라 54대 경명왕의 여섯째 왕자인 완산대군(完山大君)의 9세손 박진승을 시조로 한다. 박진승은 고려 초 국학전주(國學典酒)를 지냈으며, 공을 세워 전라도 무안을 식읍으로 하사받음으로써 후손들이 무안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입향 경위]
무안박씨로 영덕 지역에 처음 입향한 인물은 박진승의 14세손인 박지몽이다. 박지몽은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1470년경 영덕현령으로 부임한 백부 박이(朴頤)를 따라왔다가 영덕 토성인 영덕박씨 박종문(朴宗文)의 딸과 혼인하여 인량리에 정착하였다. 박지몽은 연산군 대의 권신인 임사홍(任士洪)의 고종인데 임사홍의 전횡이 장차 자신에게까지 화를 미칠 것을 염려하여 멀리 떨어진 곳에 정착했다고 한다. 박지몽은 종5품 무관직으로 오위(五衛)의 부사직(副司直)을 역임하고 불천위로 추대되었다.
박지몽의 후손 중에도 손자 박세렴(朴世廉)·박세순(朴世淳), 증손 박효장(朴孝長)·박의장(朴毅長)·박홍장(朴弘長), 현손 박유(朴瑜)·박륵(朴玏) 등 다수의 무과 출신이 배출되었다. 특히 박의장은 임진왜란 때 경주성 탈환에 큰 공을 세워 무의(武毅)의 시호를 받고 국불천위가 되었다. 박의장과 박홍장은 구봉서원(九峯書院)에 제향되었다.
[현황]
박지몽 이후 무안박씨는 경상북도 영해면 원구리와 축산면 도곡리, 창수면 갈천리·인천리·삼계리로 퍼져나가 집성촌을 이루었다. 1985년 인구통계에 의하면 무안박씨는 전국에 64,698명, 영덕군에 802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015년 인구통계에 의하면 전국에 90,785명, 영덕군에 283명이 거주하고 있다.
[관련 유적]
박세렴의 재실인 영덕 초수재사[경상북도 문화재자료], 박세순의 종택인 경수당종택[경상북도 유형문화재], 박의장의 종택인 영덕 무안박씨 무의공파 종택[국가민속문화재], 박의장의 재실 덕후루[경상북도 유형문화재], 박선의 종택인 영덕도곡동충효당[국가민속문화재], 후학 양성을 위해 건립한 흥교당(興敎堂)[경상북도 문화재자료], 박홍장의 종택인 목사공 종택(牧使公宗宅)[경상북도 문화재자료] 등이 남아 있다.
1785년에 창건된 구봉서원은 1886년에 훼철되어 현재는 부속건물 한 동만 남아 있다. 이 외에도 도곡리에 있는 경렴정(景濂亭)과 후진의 학문증진을 위해 원구리에 건립한 금서헌(琴書軒)이 남아 있다. 인량리에는 2011년에 복원한 무안박씨 영해파 종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