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3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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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靑銅器時代 |
영어공식명칭 | Bronze Ag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선사/청동기 |
집필자 | 강재현 |
[정의]
경상북도 영주 지역에서 청동기를 사용하던 시대의 역사.
[개설]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는 농경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민무늬토기와 간석기가 널리 사용되며, 사회복합도가 증가하는 시기이다. 그동안 영주 지역에서 확인된 청동기시대 유적은 지표조사를 통해 확인된 고인돌, 입석[선돌], 바위그림 등 무덤과 의례 행위와 관련된 유적뿐이었다. 그러나 근래에 들어 각종 개발에 따른 구제발굴의 증가에 따라 영주 지역에서도 청동기시대 집자리 등 생활 유적이 확인되기 시작하였다. 앞으로 청동기시대 유적이 추가로 발견될 가능성이 있으며, 이를 통해 영주 지역의 청동기시대 문화연구에 이바지할 것으로 보인다.
[생활 유적]
영주 지역의 청동기시대 유적은 그동안 고인돌, 선돌, 바위그림 등 청동기시대 무덤과 의례와 관련된 유적만이 확인되었고,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살았던 집자리는 발견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영주 지역의 청동기시대 생활상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다만 영주 대촌리 유적에서 청동기시대의 유물포함층이 발굴되었는데, 토기와 석기가 여러 점 수습되었다.
2012년 발굴 조사된 영주 가흥동 유적에서는 청동기시대 집자리 2동이 확인되었다. 집자리의 형태는 장방형이며, 규모는 길이 8~9m, 너비 4.6~5m 정도의 중형이다. 내부시설로는 1호 집자리에서 돌두름식 화덕자리[위석식 노지] 2개가 확인되었고, 2호 집자리에서는 무시설식 화덕자리와 원형 돌두름식 화덕자리가 각각 1개씩 확인되었다. 발굴조사의 특성상 마을의 일부만 조사되어 마을 전체 구조를 파악할 수 없으나 청동기시대 문화연구에 중요한 각종 유물이 종류와 수량에 있어 다양하게 출토되었다. 특히 1호 집자리 내에서 출토된 유물은 유구 내에서 다양한 크기와 문양을 가진 저장용기와 생활용기 외에 석기류 역시 사냥·어로를 포함한 벌채 및 가공에 사용된 목공구 등이 골고루 출토되었다. 영주 가흥동 유적은 경북 북부 지역에서 조사된 청동기시대 유적 가운데 가장 빠른 시기에 속하는 집자리로, 청동기시대 전기에 해당하며, 남한강을 교통로로 이용한 청동기시대 문화교류 관계연구에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무덤 유적]
영주 지역에서 청동기시대 무덤 가운데 하나인 돌널무덤이나 돌무지널무덤은 확인되지 않았다. 그동안 알려진 영주 지역의 고인돌과 선돌은 휴천리 지석 및 입석, 영주 휴천동 지석묘군, 영주 교촌리 지석묘, 영주 석포리 지석묘군, 영주 반구리 지석묘군, 영주 용산리 지석묘군, 영주 사계리 지석묘군 등이 있다. 대부분 분포조사만 한 상황이지만 영주 용산리 지석묘군과 영주 사계리 지석묘군은 그 일부가 발굴 조사된 바 있다.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고인돌의 특성을 살펴보면, 상석을 고이는 받침돌이 지석인 동시에 매장주체부의 벽이 되며 상석은 개석처럼 사용되었다. 이러한 형태는 안동 지례리 고인돌과 유사하다. 또한, 영주 청구리 입석과 휴천리 지석 및 입석의 경우와 같이 고인돌과 선돌이 함께 발견되는 예도 있는데, 이는 드문 경우로 영주 지역에서 두드러지는 점이다.
[바위그림]
영주 지역의 청동기시대 바위그림 유적으로는 영주 가흥리 암각화[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48호]가 있다. 영주 가흥리 암각화는 영주 가흥동 마애삼존상 및 여래좌상[보물 제221호]이 조각된 수직의 자연 암벽 하단부에서 확인되었다. 규모는 높이 1~1.5m, 너비 4.5m이며, 방패 모양 또는 석검 손잡이, 신의 얼굴 등으로 불리는 문양이 새겨져 있다. 영주 가흥리 암각화는 경주 석장동 암각화, 고령 장기리 암각화, 포항 칠포리 암각화 등지의 청동기시대 바위그림과 동일 유형에 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