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6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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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念祖 |
영어공식명칭 | Kim Yeom-jo |
이칭/별칭 | 효수(孝脩),학음(鶴陰)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수환 |
[정의]
조선 후기 영주 지역에서 활동한 문신.
[개설]
김염조(金念祖)[1589~1652]는 과천현감·안산군수·종친부전첨 등을 지낸 문신이다.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의병을 일으켜 과천 지역을 수호하였다.
[가계]
김염조의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효수(孝脩), 호는 학음(鶴陰)이다. 아버지는 산음현감을 지낸 김대현(金大賢)[1553~1602], 어머니는 충의위 이찬금(李纘金)의 딸 증 정부인 전주이씨(全州李氏)인데 좌참찬을 지낸 재종숙 김수현(金壽賢)[1565~1653]에게 출계하였다. 할아버지는 장예원사의를 지낸 김농(金農)[1534~1591], 증조할아버지는 훈련원부정을 지낸 김의정(金義貞)[1495~1547]이다. 부인은 교수를 지낸 류심(柳樳)의 딸 숙부인 풍산류씨(豊山柳氏)이다.
김염조는 아홉 형제 가운데 일곱째이다. 일찍 세상을 떠난 여덟째 김술조(金述祖)[1595~1611]를 제외하고, 김봉조(金奉祖)[1572~1630]·김영조(金榮祖)[1577~1648]·김창조(金昌祖)[1581~1637]·김경조(金慶祖)[1583~1645]·김연조(金延祖)[1585~1613]·김응조(金應祖)[1587~1667]·김염조·김숭조(金崇祖)[1598~1632]가 모두 현달하였다. 여덟 명이 사마시에 급제하고, 다섯 명이 문과에 급제하였기에 인조는 이들 형제를 ‘팔련오계지미(八蓮五桂之美)’라고 불렀다.
김염조의 풍산김씨 가문은 안동부 풍산현 오릉동(五陵洞)[지금의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에 세거지를 형성하였지만, 할아버지 김농이 영천군(榮川郡) 봉향리(奉香里)[지금의 영주시 휴천동]로 이주함에 따라 영주 지역과도 인연을 맺었다. 김염조는 영주 지역과 안동 지역을 오가며 활동했지만, 44세 때 재종숙 김수현에게 출계함으로써, 김염조의 후손들은 경기도 파주에 세거지를 형성하게 되었다.
[활동 사항]
김염조는 어릴 때부터 효성과 우애가 깊었으며, 젊은 시절에는 주로 향촌 사회에서 활동하였다. 44세 때 재종숙 김수현에게 출계하였고, 음직(蔭職)으로 사산감역에 제수되었다. 한양에 있으면서 김염조는 경상도 출신의 인사들과 함께 동도회(東道會)를 결성하여 우애를 다지곤 했다.
김염조는 1635년(인조 13) 생원시에 급제하였으며, 1636년 과천현감으로 부임하였다. 1635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김염조는 고을 아전 변취일(邊就逸)·변해일(邊海逸) 형제와 더불어 의병을 일으켰다. 또 조경(趙絅)[1586~1669]과 함께 관악산으로 들어가 죽음을 맹세하였으며, 남양부사 윤계(尹棨)[1583~1636]를 비롯해 조익(趙翼)[1579~1655]·심지원(沈之源)[1593~1662] 등에게 격문을 보냈다. 하지만 군량미 확보가 어려웠고 청나라군의 기세 때문에 창의 병력이 더 모이지 않아, 남한산성으로 진격하지 못하고 과천과 관악산 일대에서 전란이 끝날 때까지 적군과 대치할 수밖에 없었다. 임기를 마친 후 과천현의 백성들이 김염조를 기리는 선정비를 건립하였다.
김염조는 1639년 공조좌랑을 거쳐 1640년 정산현감으로 부임하였다. 부임지에서 향교를 옮겨 짓고 고을의 젊은 인재를 양성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향축을 청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간원의 탄핵을 당하기도 했다. 1648년(인조 26) 안산군수로 부임하였는데, 재임 중 문묘를 크게 고쳤고 흉년을 만난 백성들에게 녹봉을 나누어 주는 등 치적이 있었다. 하지만 1649년 고을에서 일어난 범죄 사건을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탄핵을 당하였고, 얼마 후 직첩을 환급받았다. 이후 공조정랑·사복시첨정·종친부전첨에 제수되었다.
[묘소]
김염조의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가야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김염조는 좌승지에 증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