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6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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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榮祖 |
영어공식명칭 | Kim Yeong-jo |
이칭/별칭 | 효중(孝仲),망와(忘窩)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광우 |
출생 시기/일시 | 1577년 - 김영조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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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01년 - 김영조 생원시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12년 - 김영조 증광시 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18년 - 김영조 승문원박사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23년 - 김영조 문안관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625년 - 김영조 홍문관수찬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26년 - 김영조 세자시강원필선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28년 - 김영조 성균관사예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29년 - 김영조 홍문관교리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29년 - 김영조 북평사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630년 - 김영조 길주목사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633년 - 김영조 주청부사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36년 - 김영조 병자호란 창의 |
활동 시기/일시 | 1637년 - 김영조 사간원대사간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38년 - 김영조 성균관대사성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41년 - 김영조 이조참판 제수 |
몰년 시기/일시 | 1648년 - 김영조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669년 - 김영조 향현사[구강서원] 제향 |
출생지 | 김영조 출생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
거주|이주지 | 김영조 거주지 - 경상북도 영주시 휴천동 |
거주|이주지 | 김영조 거주지 -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
수학지 | 이산서원 -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내림리 |
부임|활동지 | 김영조 부임지 - 함경북도 길주군 |
묘소|단소 | 김영조 묘소 -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보계리 |
사당|배향지 | 향현사 - 경상북도 영주시 휴천동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풍산(豊山) |
대표 관직 | 형조정랑|길주목사|이조참판 |
[정의]
조선 후기 영주 지역에 거주한 문신.
[개설]
김영조(金榮祖)[1577~1648]는 문과 급제 후 형조정랑·길주목사·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가계]
김영조의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효중(孝仲), 호는 망와(忘窩)이다. 아버지는 산음현감을 지낸 김대현(金大賢)[1553~1602], 어머니는 충의위 이찬금(李纘金)의 딸 증 정부인 전주이씨(全州李氏), 할아버지는 장예원사의를 지낸 김농(金農)[1534~1591], 증조할아버지는 훈련원부정을 지낸 김의정(金義貞)[1495~1547]이다. 김영조의 부인은 문충공 김성일(金誠一)[1538~1593]의 딸 증 정부인 의성김씨(義城金氏)와 군자감정을 지낸 권래(權來)의 딸 증 정부인 안동권씨(安東權氏)이다.
김영조는 아홉 형제 가운데 둘째이다. 일찍 세상을 떠난 여덟째 김술조(金述祖)[1595~1611]를 제외하고, 김봉조(金奉祖)[1572~1630]·김영조·김창조(金昌祖)[1581~1637]·김경조(金慶祖)[1583~1645]·김연조(金延祖)[1585~1613]·김응조(金應祖)[1587~1667]·김염조(金念祖)[1589~1652]·김숭조(金崇祖)[1598~1632]가 모두 현달하였다. 여덟 명이 사마시에 급제하고, 다섯 명이 문과에 급제하였기에 인조는 이들 형제를 ‘팔련오계지미(八蓮五桂之美)’라고 불렀다. 김영조의 풍산김씨 가문은 안동부 풍산현 오릉동(五陵洞)[지금의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에 세거지를 형성하였지만, 할아버지 김농이 영천군(榮川郡) 봉향리(奉香里)[지금의 영주시 휴천동]로 이주함에 따라 영주 지역과도 인연을 맺었다.
[활동 사항]
김영조는 1577년(선조 10) 한양 장의동(藏義洞)[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일대]에서 출생하였다. 6세 때 영천군 봉향리로 내려왔으며, 8세 때 권두문(權斗文)[1543~1617]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1591년(선조 24) 통신사로 다녀온 김성일을 찾아뵙고 가르침을 받았는데, 이것이 인연이 되어 훗날 김성일의 둘째 사위가 되었다. 1600년 이산서원에서 원장을 역임하고 있던 아버지 김대현으로부터 『가례(家禮)』와 『소학(小學)』 등을 배웠다.
김영조는 1601년(선조 34) 생원시에 급제하였다. 1608년 성균관에 있을 때 정인홍(鄭仁弘)[1535~1623]이 유배되는 일이 발생하였는데, 이때 경상우도의 많은 선비가 정인홍을 구원하기 위해 성균관에 통문을 보냈지만, 평소 정인홍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김영조는 성균관 유생들의 답통(答通)을 저지하였다.
김영조는 1612년(광해군 4) 증광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1618년(광해군 10) 승문원박사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 무렵 김영조는 정인홍 세력의 전횡을 미워하여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았으며, 정인홍 세력을 통렬히 비판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당시 세상 사람들이 경상도 하도(下道)는 정구(鄭逑)[1543~1620]에 의해, 경상도 상도(上道)는 김영조에 의해 선비들의 기강이 잡힐 수 있었다고 말하였다. 이 무렵 김영조는 영천군 봉향리에 아버지가 세운 유연당(悠然堂) 옆에 집을 짓고 ‘망와(忘窩)’라고 편액을 했다.
김영조는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물러나자 조정의 부름을 받고 관직에 나아갔으며, 1623년에 문안관으로 임명되어 가도(椵島)에 주둔 중이던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1576~1629]을 만나고 돌아왔다. 이후 군기시첨정·사헌부장령·성균관사예·홍문관교리 등을 거쳐, 1630년 길주목사로 부임하였는데, 재임 중 치적을 남겨 임기를 마친 후 백성들이 공덕비를 세워주었다. 1633년(인조 11) 장예원판결사에 제수되었으며, 세자 책봉과 관련해 주청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고을 사람들이 김영조를 의병장으로 추대하려고 했으나, 김영조는 향병을 기다릴 수 없다며 동생 김응조와 함께 남한산성으로 향했지만 길이 막혀 이르지 못하였다. 1637년 사간원대사간, 1638년 예조참판에 제수되었다. 이때 사신으로 심양에 갔는데 청나라 장수에게 예를 행하는 것을 치욕이라 생각하고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1641년 이조참판에 오른 것을 끝으로 관직에서 사퇴하였다. 1648년 세상을 떠나자 인조가 예조정랑 김진원(金震遠)[1601~1653]을 보내어 치제하였다.
[학문과 저술]
김영조의 문집으로 6권 4책의 『망와집(忘窩集)』이 전한다. 『망와집』에는 「서정록(西征錄)」, 「북정록(北征錄)」, 「조천록(朝天錄)」이 수록되어 있다. 「서정록」은 자문점마관으로 관서에 갔을 때, 「북정록」은 북평사와 길주목사로 관북에 갔을 때, 「조천록」은 주청부사로 명나라에 갔을 때 지은 시들을 엮은 것이다.
[묘소]
김영조의 묘소는 영주시 부석면 보계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김영조는 1669년(현종 10) 향현사(鄕賢祠)에 제향되었다. 향현사는 김담(金淡)[1416~1464]·박승임(朴承任)[1517~1586]·김륵(金玏)[1540~1616]·김영조를 제향하는 사우였는데, 훗날 귀강서원(龜江書院)으로 승격되었다. 귀강서원은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철폐된 후 복설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