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6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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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尙彦 |
영어공식명칭 | Lee Sang-eon |
이칭/별칭 | 용수(容叟),성서(城西)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광우 |
출생 시기/일시 | 1597년 - 이상언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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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23년 - 이상언 사마시 급제 및 파방 |
활동 시기/일시 | 1633년 - 이상언 진사시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48년 - 이상언 정시 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56년 - 이상언 안악군수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658년 - 이상언 영암군수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662년 - 이상언 정선군수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664년 - 이상언 함안군수 부임 |
몰년 시기/일시 | 1671년 - 이상언 사망 |
출생지 | 이상언 출생지 - 경상북도 영주시 봉현면 유전리 |
수학지 | 도산서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도산서원길 154[토계리 산61-1] |
부임|활동지 | 이상언 부임지 - 황해도 안악군 |
부임|활동지 | 이상언 부임지 - 전라남도 영암군 |
부임|활동지 | 이상언 부임지 - 강원도 정선군 |
부임|활동지 | 이상언 부임지 - 전라남도 영광군 |
부임|활동지 | 이상언 부임지 - 경상남도 함안군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경주(慶州) |
대표 관직 | 사간원정언|영암군수|함안군수 |
[정의]
조선 후기 영주 출신의 문신.
[개설]
이상언(李尙彦)[1597~1671]은 문과 급제 후 사간원정언·영암군수·함안군수 등을 지냈다.
[가계]
이상언의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용수(容叟), 호는 성서(城西)이다. 아버지는 성균관학유를 지낸 이휘음(李徽音)[1575~1609], 어머니는 통례원좌통례를 지낸 권두문(權斗文)[1543~1617]의 딸 안동권씨(安東權氏), 할아버지는 산음현감을 지낸 이개립(李介立)[1546~1625], 증조할아버지는 어모장군 이해(李𥩲)이다. 부인은 판교를 지낸 정언굉(鄭彦宏)[1569~1640]의 딸 동래정씨(東萊鄭氏)와 충의위 박혼(朴焜)의 딸 반남박씨(潘南朴氏)이다.
[활동 사항]
이상언은 1597년(선조 30) 경상도 풍기군 유전리(柳田里)[지금의 영주시 봉현면 유전리]에서 출생하였다. 1623년(인조 1) 사마시에 급제하였으나 해당 과거가 파방되어 주위 사람들이 안타까워했다. 1624년 도산서원에서 공부하였으며, 1633년(인조 11) 진사시 급제 후에는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이상언은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인조가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항복하자 통곡한 뒤 고향으로 돌아와, 십여 년간 과거에 뜻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 이휘음이 설득하고, 김응조(金應祖)[1587~1667]가 편지를 보내 권하였기에 다시 과거 준비를 하였다. 이에 1648년(인조 26) 정시 문과에 급제하였고, 이후 홍문관정자·사간원정언·예조좌랑·성균관직강을 거쳐 1656년 안악군수로 부임하였다. 1658년에는 영암군수로 부임하였는데 치적을 남겼다.
이상언은 1662년(현종 3) 정선군수로 부임하였다. 정선 지역은 고지대에 위치하여 식수가 부족하였는데, 새로 부임한 이상언이 우물을 파서 식수를 마련해주니, 백성들이 이상언의 덕을 기리는 송덕비를 세워주었다. 이어 영광군수로 이배하였다. 당시 영광군은 해읍(海邑)으로서 소금과 어장으로 인한 폐단이 많았다. 또 고을에서 횡령하는 것이 많았는데, 모두 바로잡았다.
이상언은 1664년에는 함안군수에 특별히 제수되었다. 이상언은 사직을 청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부임하였다. 수개월 후 전염병 때문에 함안군 검암리(儉巖里)[지금의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검암리]로 피신하였는데, 검암리의 경관을 좋아하여 정사(精舍)를 짓고 고을 학생들을 가르쳤다. 하지만 이듬해 고을의 미태(米太)를 실은 선박이 침몰하는 사건이 발생해 탄핵을 받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만년에는 고향에서 여러 선비와 사마계를 결성하였다.
[학문과 저술]
이상언의 문집으로 6권 3책의 『성서집(城西集)』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