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6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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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韓山斗 |
영어공식명칭 | Han San-do |
이칭/별칭 | 사첨(士瞻),추월당(秋月堂)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병훈 |
출생 시기/일시 | 1556년 - 한산두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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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01년 - 한산두 진사시 입격 |
몰년 시기/일시 | 1627년 - 한산두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786년 - 한산두 노계리사 제향 |
출생지 | 한산두 출생지 - 경상북도 영주시 봉현면 노좌리 |
활동지 | 화왕산성 - 경상남도 창녕군 |
묘소 | 한산두 묘소 - 경상북도 영주시 봉현면 |
성격 | 의병 |
성별 | 남 |
본관 | 청주(淸州) |
대표 경력 | 진사 |
[정의]
조선 후기 영주 출신의 학자 겸 의병.
[개설]
한산두(韓山斗)[1556~1627]는 진사시에 급제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다.
[가계]
한산두의 자는 사첨(士瞻), 호는 추월당(秋月堂),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장사랑 한영년(韓永年), 할아버지는 참봉을 지낸 한필(韓珌), 아버지는 성균관 생원 한일취(韓日就), 어머니는 참봉 진황(秦晃)의 딸 영정진씨(永貞秦氏)이며, 부인은 충순위 이윤복(李潤福)의 딸 합천이씨(陜川李氏)이다.
[활동 사항]
한산두는 정유재란 때 대신들이 도성을 비우고 파천할 것을 주장하자, 상소문을 올려 직접 임금이 한양을 사수할 것을 청원하였다. 또 한산두는 의병으로 자원하여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1552~1617]를 도와 창녕 화왕산성 전투에 참전하였다.
한산두는 1601년(선조 34) 진사시에 입격한 후 벼슬에 대한 뜻을 끊고, 고향 경상도 풍기군 노계리[지금의 영주시 봉현면 노좌리]에 작은 서실을 지은 뒤 ‘추월당(秋月堂)’이라 명명하였다. 이후 한산두는 추월당에서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매진하였다. 1605년 안동에서 성균관에 답통하는 일로 향회가 개최되었을 때 도유사로 선출되기도 했다. 김령(金坽)[1577~1641]·이찬(李燦)[1575~1654]·이개립(李介立)[1546~1625] 등과 교유하였다.
[저술 및 작품]
한산두의 문집으로 『추월당집(秋月堂集)』이 전한다. 1811년(순조 11) 한산두의 6대손 한덕봉(韓德鳳)이 편집하고, 한덕봉의 아우 한덕준(韓德峻)이 간행하였다.
[묘소]
[상훈과 추모]
한산두는 1788년(정조 12) 건립된 노계리사(魯溪里社)에 제향되었다. 노계리사는 1847년(헌종 13) 노계서원(魯溪書院)으로 승격하였다. 이후 흥선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철폐되었다가, 2004년 영주시 봉현면 노좌리에 노계서원으로 복설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