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6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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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琴軔 |
영어공식명칭 | Geum In |
이칭/별칭 | 백임(伯任),송계(松溪)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감병훈 |
[정의]
조선 전기 영주 출신의 학자.
[개설]
금인(琴軔)[1510~1593]은 이황(李滉)[1501~1570]의 문인으로 진사시에 급제하였다.
[가계]
금인의 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백임(伯任), 호(號)는 송계(松溪)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은진현감을 지낸 금회(琴淮), 할아버지는 군위현감을 지내고 청백리로 알려진 금계(琴啓)[1439~1497],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를 지낸 금원수(琴元壽), 어머니는 안동김씨(安東金氏)로 장령을 지낸 김영수(金永銖)[1446~1502]의 딸이다. 부인은 우계이씨(羽溪李氏)로 이장(李樟)의 딸이다. 금인의 아들 금복고(琴復古)[1549~1632]가 현달하였다.
[활동 사항]
금인은 1540년(중종 35)에 실시한 식년시에서 등과하여 진사가 되었다. 명종 연간 외척 정치로 인해 정치가 문란해지자, 순흥 도촌(桃村)[지금의 봉화군 봉화읍 도촌리]으로 낙향하여 후학들을 양성하는 데 힘을 썼다. 동생 금보(琴輔)[1521~1584]와 우애가 깊었는데, 서로 공부하다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곧잘 스승 이황에게 물어보는 등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자신이 배운 것을 후학들에게 최선을 다해 가르쳤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봉화군의 북쪽에 있는 응인산(應仁山)으로 피신했다가 얼마 후 병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금인의 현손인 금성(琴筬)이 금인의 유문을 모아 1618년(광해군 10) 『송계일집(松溪逸集)』을 간행하였다. 가장(家狀)은 금성이 직접 썼고, 발문은 배유장(裵幼章)[1618~1687], 실록(實錄)은 권성오(權省吾)[1587~1671]가 썼다.
[묘소]
금인의 묘소는 봉화군 법전면 풍정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금인은 1596년(선조 29)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남몽오(南夢鰲)·박선장(朴善長)·권호신(權虎臣)[1558~1629] 등과 함께 구만서원(龜灣書院)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