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7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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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滉 |
영어공식명칭 | Lee Hwang |
이칭/별칭 | 경호(景浩),퇴계(退溪),퇴도(退陶),문순(文純)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순한 |
출생 시기/일시 | 1501년 - 이황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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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34년 - 이황 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539년 - 이황 홍문관수찬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548년 - 이황 단양군수 및 풍기군수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552년 - 이황 성균관대사성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568년 - 이황 홍문관대제학 제수 |
몰년 시기/일시 | 1570년 - 이황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573년 - 이황 이산서원 제향 |
추모 시기/일시 | 1662년 - 이황 욱양서원 제향 |
출생지 | 이황 출생지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 |
외가|처가 | 이황 처가 - 경상북도 영주시 조암동 |
묘소|단소 | 이황 묘소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
사당|배향지 | 이산서원 -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내림리 |
사당|배향지 | 욱양서원 -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 |
성격 | 문신|학자 |
성별 | 남 |
본관 | 진성(眞城) |
대표 관직|경력 | 풍기군수|홍문관대제학 |
[정의]
조선 전기 영주 지역에서 지방관을 지낸 문신이자 학자.
[개설]
이황(李滉)[1501~1570]은 조선 전기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성리학자로서 풍기군수와 홍문관대제학 등을 지냈다. 특히 풍기군수로 있으면서 조정에 건의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소수서원(紹修書院)으로 사액 받았다. 또 영주 이산서원(伊山書院) 건립에 관여하였으며, 원규를 제정하였다. 이후 이황의 이산서원 원규는 조선시대 서원의 표준이 되었다.
[가계]
이황의 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퇴도(退陶),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선산부사 이정(李禎), 할아버지는 진성군 이계양(李繼陽)[1424~1488], 아버지는 진사 이식(李埴)[1463~1502], 어머니는 사정을 지낸 박치(朴緇)[1441~1499]의 딸 춘천박씨(春川朴氏)이다. 이해(李瀣)[1496~1550]의 동생이다. 첫 번째 부인은 진사 허찬(許瓚)의 딸 김해허씨(金海許氏)이며, 두 번째 부인은 광흥창봉사 권질(權礩)[1483~1545]의 딸 안동권씨(安東權氏)이다. 첫 번째 부인 김해허씨와 혼인 당시 경상도 영천군(榮川郡) 초곡(草谷)[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조암동]에 거주하고 있었다.
[활동 사항]
이황은 생후 7개월 때 아버지를 여의었으며, 12세 때 작은아버지 이우(李堣)[1469~1517]로부터 『논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1527년(중종 22) 27세 나이로 진사시와 생원시에 모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1534년 문과에 급제한 후 승문원부정자·홍문관수찬을 거쳐, 1543년(중종 38) 성균관사성에 올랐다. 1545년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모든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그 뒤에도 자주 임관의 명을 받게 되자, 스스로 어지러운 중앙직을 피하여 외직을 지원하였고, 48세에 단양군수가 되었다가 풍기군수로 전임하였다.
이황은 1552년(명종 7) 52세 때 성균관대사성에 올랐고, 56세에 홍문관부제학, 58세에 공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고사하였다. 60세 때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지어 기거하면서 독서·수양·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많은 제자를 훈도하였다. 이때 공조판서·홍문관대제학에 임명되었으나, 그때마다 고사하고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1570년(선조 3) 7월에는 제자들과 함께 새로 지은 역동서원(易東書院)에서 강학하였고, 1570년 12월 8일 세상을 떠났다.
이황은 예안현 출신이지만 어린 시절부터 영주 지역과 인연이 깊었다. 20세를 전후한 청년기에 영주 지역과 소백산 등지에서 학문을 닦았으며, 처가가 영주 지역이었다. 이에 당대 영주의 대표적인 학자들 가운데 이황의 훈도를 받지 않은 인물이 없을 정도였다. 이후 풍기군수로 부임하면서 다시 영주 지역과 인연을 맺게 되는데, 가장 큰 업적은 1549년(명종 4) 소수서원 사액이다. 이황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을 사림의 이상적인 강학처로 생각하였다. 이에 조정에 청원하여 소수서원으로 사액을 받게 되고, 관으로부터의 재정적 지원을 끌어냈다.
1558년(명종 13) 영천군수(榮川郡守)로 부임한 안상(安瑺)은 이황에게 이산서원 건립에 대한 자문을 구하였다. 이에 이황은 자신의 의지와 소신을 담아 건물 이름을 직접 명명하고, 편액까지 직접 써주었다. 또한, 기문과 원규까지 제정하여 배포하는 등 서원 건립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였다. 특히 이황이 제정한 이산서원의 원규는 이후 설립되는 여러 서원 원규의 모범이 되었다.
[학문과 저술]
이황은 16세기 우리나라를 대표하던 성리학자로서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다. 이황의 학문을 계승한 이들을 영남학파 또는 퇴계학파라고 하는데, 영주 지역에도 이황의 학풍을 계승한 이들이 다수 분포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황준량(黃俊良)[1517~1563]과 박승임(朴承任)[1517~1586]이 있다.
이황의 주요 저서로는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계몽전의(啓蒙傳疑)』, 『자성록(自省錄)』, 『고경중마방(古鏡重磨方)』, 『송계원명이학통록(宋季元明理學通錄)』, 『경현록편정별록(景賢錄編定別錄)』, 『성학십도(聖學十圖)』, 「서명고증강의(西銘考證講義)」 등이 있다.
[묘소]
이황의 묘소는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이황은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순(文純)’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문묘와 종묘에 종사되었다. 1573년(선조 6) 영주 이산서원에 제향되었으며, 1662년(현종 3)에는 영주 욱양서원에 제향되었다. 그 외 안동 도산서원 등 전국의 40여 개 이상 서원에 제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