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7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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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季鎭 |
영어공식명칭 | Kim Gye-jin |
이칭/별칭 | 김승철(金承哲)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출생 시기/일시 | 1907년 1월 24일 - 김계진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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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28년 - 김계진 아도서숙 운영위원 활동 |
활동 시기/일시 | 1930년 - 김계진 영주 2차 격문 투쟁 주도 |
활동 시기/일시 | 1932년 - 김계진 영주적색농민조합재건투쟁위원회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32년 12월 7일 - 김계진 혁명적농민조합 창립총회 개최 |
몰년 시기/일시 | 2000년 8월 5일 - 김계진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2005년 - 김계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출생지 | 김계진 출생지 - 경상북도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 |
거주|이주지 | 김계진 거주지 - 경상북도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 |
활동지 | 김계진 활동지 - 경상북도 영주시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영주적색농민조합재건투쟁위원회 활동 |
[정의]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김계진(金季鎭)[1907~2000]은 1920년대 영주청년동맹과 신간회 영주지회에서 활동하였으며, 1932년에는 영주적색농민조합재건투쟁위원회 운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가계]
김계진은 1907년 1월 24일 지금의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에서 출생하였다.
[활동 사항]
김계진은 1920년대 후반 영주청년동맹과 신간회 영주지회에서 사회운동을 전개하였다. 고향 수도리에서는 문맹 퇴치, 우리글 교육, 민족정신 앙양 등을 교육방침으로 하는 아도서숙(亞島書塾)의 운영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영향으로 영주 지역에서는 격문 투쟁이 여러 차례 일어났다. 이에 1930년 3월 김계진은 송위길(宋渭吉)[1909~1989]·이상을(李相乙)[1907~1944] 등과 함께 「만천하 피압박 대중에게 격함」이라는 제목의 격문을 인쇄하여, 3월 24일 영주 장날 정오를 기해 살포하기로 결의하였다. 격문에는 ‘조선민족해방’과 ‘무산계급해방만세’를 비롯해 당면 구호로 ‘언론·집회·결사의 자유를 획득하자’, ‘모든 악법을 철폐하자’, ‘소위 광주학생사건 피고들의 무죄를 주장하자’,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 ‘조선총독 폭압정치에 항쟁하자’, ‘투옥 동지를 탈환하자’ 등 정치적 투쟁 사항이 명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거사 하루 전인 1930년 3월 23일 밤 일제 관헌에 발각되어, 김계진 등 이른바 영주 2차 격문 투쟁을 준비하던 인사들이 체포되고 말았다. 김계진은 1930년 4월 23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송위길과 함께 출판법 위반 및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언도받았다.
김계진은 1932년 영주공산주의자협의회의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이 일제의 주요 인사 검거로 좌절되자, 이것의 재건을 구상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1932년 9월 무렵 안동의 사회운동가 안상윤(安相潤)[1911~1949]이 일제의 검거를 피해 현 문수면 수도리에 숨어들었다. 이에 김계진은 김종진(金鍾鎭)[1904~1952]·김명진(金命鎭)[1908~1955] 등과 안상윤을 찾아가 영주의 사회운동에 대해 논의하였고, 안상윤의 건의에 따라 1932년 10월 5일 ‘영주공산주의운동의 부활을 도모’하기 위해 영주적색농민조합재건투쟁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후 독서회를 통해 사회운동 이론을 학습하였으며, 1932년 12월 7일에는 김종진·김용진·박찬상·김명진 등과 함께 수도리를 중심으로 혁명적농민조합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이후 김계진은 일제 관헌에 체포되었고, 1934년 7월 2일 대구지방법원 형사부 재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언도받았다.
[상훈과 추모]
김계진은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