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3022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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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龍珠里-堂祭 |
영어의미역 | Village-Ritual Ceremony of Gonae Village, Yongju-ri |
이칭/별칭 | 당산제,도제 |
분야 | 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무형 유산 |
유형 | 의례/제 |
지역 | 전라남도 여수시 화양면 용주리 고내마을 |
집필자 | 나경수 |
[정의]
전라남도 여수시 화양면 용주리 고내마을에서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기 위해 지내는 마을 제사.
[개설]
용주리 고내 당제는 매년 음력 정월 초이튿날에 주민들이 지내는 공동 제의이다. 이를 ‘당산제’, ‘도제’ 모신다고 한다. 당제는 ‘당집’에서 모시는데, 마을 사람들은 당에 당산할아버지가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신격은 당산할아버지라 할 수 있다.
당제는 현재 음력 정월 초하룻날 자정 넘어서 모시는데, 예전에는 정월 초나흗날에 모셨다고 한다. 제일을 옮겨 모시게 된 것은, 설날을 지나서 제를 모실 경우 제를 앞두고 마을에 유고가 생기면 마을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유고가 있는 사람은 마을을 나가야 하기 때문에 서로 힘이 들어서 마을회의를 통해 초하룻날로 앞당겨 모신 것이라 한다.
당제 모시는 사람들을 ‘당주’라 부르는데, 제 모시기 앞서 섣달에 마을회의를 통해 결정한다. 예전에는 당주 1명과 함께 당주를 도와주는 ‘수종꾼’ 1명을 뽑았으나 지금은 당주만 선출한다. 당주는 깨끗한 사람으로 뽑는데, 당주로 뽑히면 제 모시기 사흘 전부터 바깥출입을 삼간다. 그리고 당주 집에는 초상나거나 출산한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고, 당주 또한 초상난 집이나 출산한 집을 다니지 않는 등 행동거지를 조심한다.
예전에는 제를 앞두고 당주는 목욕재계하여 몸을 깨끗이 했다. 그리고 소변·대변을 보면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 그래서 당주가 제를 모시러 갈 때는 옷을 세 벌을 챙겨가지고 갔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까지 하지 않는다. 지금은 이장이 당주를 하고, 수종꾼은 따로 뽑지 않는다. 제비는 마을기금으로 충당하며, 대략 10만원이 소요된다. 연말회의 할 때 제비를 미리 결정하여 알려주므로, 정해진 금액으로 제물을 마련한다. 예전에는 마을 전답으로 제사비용을 마련하였다고 한다.
[연원 및 변천]
고내마을 주민들은 당제를 언제부터 모시게 되었는지 자세히 알지 못하나 조상 대대로 해오던 방식 그대로 모시고 있다. 이 마을 역시 한동안 제를 모시지 않았다. 1960년까지 쭉 모셔오다가 이후 20여 년 동안 중단되었으며, 10여 년 전인 1997년경부터 다시 제를 모시고 있다.
예전에는 고내마을과 이웃인 고외마을이 교대로 제를 모셨다. 고외마을에 사정이 생겨 제를 모시지 않자 고내마을은 제를 모실 것을 재촉하다가 시간이 흘렀고, 그 와중에 당집이 무너지자 더욱 제를 모시지 않게 되었다. 당집이 무너지지 않았더라면 제는 계속 모셨을 것이라 한다. 1997년부터 고내마을을 중심으로 제를 다시 모시게 된 것은 주민 가운데 바다일을 보는 사람들이 많아 이들의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고, 마을 사람 모두의 안녕을 위해서라고 한다.
[신당/신체의 형태]
당집은 예전에는 마을 뒤 산중턱에 위치하였고, 당집 안에는 산할아버지와 호랑이가 그려진 그림 1장이 벽에 걸려 있었다. 사람들은 이 그림이 무서워 당집에 함부로 들어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 당집이 무너진 뒤로 제를 모시지 않다가 마을 기금으로 10여 년 전에 당집을 신축하여 다시 제를 모시고 있다.
현 당집의 위치는 마을 앞이며 바다에 인접한, 울창한 숲으로 이루어진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이 당집은 규모가 작은 두 칸의 시멘트 건물로 지붕은 기와를 얹었고 당집 주위는 시멘트로 된 담을 둘러놓았다. 그리고 철제로 된 대문을 만들어 놓아 평상시에는 외부인들이 출입하지 못하도록 문을 잠가 놓는다. 당집 옆으로 수종이 팽나무인 당산나무가 위치해 있다. 예전에는 벅수 옆에도 수종이 귀목나무인 당산나무가 있었으나 오래 전에 고사했다고 한다.
[절차]
제를 모시는 시간이 되면 당주는 준비한 제물을 들고 제당으로 올라간다. 당주 외에 주민들은 제에 참여하지 않는다. 당주는 마을 사람들을 만나지 않으려고 제의 시간에 앞서 혼자서 제당으로 올라간다. 정월 초하룻날 자정이 되면 제물을 진설한다. 제물은 사과, 배, 귤, 곶감, 밤, 대추, 명태포, 떡시루, 나무, 전, 조기, 메 한 그릇 등을 올린다. 육고기나 탕은 올리지 않는다.
제물이 모두 진설되면 제주로 막걸리를 올리고 재배한다. 재배를 세 번 한 뒤에 이어서 구축을 하는데, 마을에 탈이 없고 고기를 잘 잡게 해달라고 축언한다. 구축이 끝나면 진설된 제물을 조금씩 한지에 싸서 당집 옆의 당산나무 밑에 묻고 이어서 벅수 밑에 묻는다. 예전에 당집이 산중턱에 있을 때는 당집에서 제를 모신 뒤에 그 상을 가지고 당산나무 앞에서 다시 제를 모셨으나 지금은 당산나무에 제물을 묻는 것으로 대신한다.
지금은 당주가 헌식을 묻는 것으로 모든 제의가 끝나지만, 예전에는 제 모신 다음날 아침이면 마을 앞 바닷가에서 ‘헌식’을 했다. 당제를 깨끗이 모신 뒤에 잡귀를 물리치고 마을의 안정과 건강을 기원하기 위해서이다. 정월 초나흗날 아침이면 집집마다 한 상 가득 제물을 차려가지고 나온다. 이 상을 바다를 향해 차려놓고 제를 올린다. 제물은 주로 생선, 과일, 떡, 전 등 설음식이다. 이렇게 헌식하는 동안 굿을 치면서 바닷가에 모인 마을 사람들은 모두가 흥겹게 어울린다.
[부대행사]
용주리 고내 당제를 지내고 헌식이 끝난 후에는 굿판을 벌였다. 고내마을은 그간 굿을 치다가 최근 2년간 굿을 치지 않았다. 왜냐하면 마을에 젊은 사람들이 없고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준비가 잘 되지 않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굿판이 마당밟이로 이어졌는데, 모든 집들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마당밟이를 해달라고 요구하는 집만 돌면서 했다.
제대로 된 마당밟이는 30여 년 전에 하고 이후 한 적이 없다. 마당밟이가 끝날 무렵에 ‘판굿’이라 하여 모닥불을 피워놓고 서로 넘어들면서 굿을 치기도 했다. 이렇게 해야 그해 무병하고 마을의 모든 액을 물리쳐 잡귀가 범접하지 않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