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600375
한자 日帝强占期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예산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문경호

[정의]

1910년에서 1945년까지 일제의 식민 통치 시기 충청남도 예산 지역의 역사.

[개설]

일제는 1904년 한일의정서, 1905년 을사조약, 1907년 한일신협약, 1909년 기유각서, 1910년 경찰권위탁각서 등을 통해 외교권, 행정권, 사법권, 경찰권 등을 차례로 빼앗았다. 마침내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조약(韓日合邦條約)을 통하여 한국을 식민지화하였다. 1910년대 일제는 헌병경찰을 동원하여 한국인들의 자유와 권리를 탄압하고, 토지조사사업, 산림령, 어업령, 광업령 등을 통해 토지와 자원에 대한 약탈을 자행하였다. 3.1운동 이후 일제는 이른바 문화통치를 내세웠지만 문화통치는 한국인들을 분열시키기 위한 기만정책에 불과하였다. 오히려 산미증식계획을 통해 식량을 반출하고 농민과 노동자들을 착취하였으며, 「치안유지법」 등을 만들어 독립운동을 철저히 탄압하였다. 1929년 경제대공황으로 세계의 경제가 침체되자 일제는 부족한 자원과 자본을 새로운 식민지에서 얻기 위해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 전쟁 등을 차례로 일으켰다. 이 시기 일제는 침략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민족 말살 정책을 추진하면서 국가총동원령 등을 통해 인적·물적 자원을 가혹하게 수탈하였다.

예산에서도 이와 같은 일제의 식민지배 정책이 강력하게 시행되었다. 1920년대 후반부터 1945년까지 각종 진흥회와 역행 청년회, 부인근로계, 식산계 등을 조직하여 일제의 식민지 정책을 선전하며 예산 주민들에 대한 감시와 통제를 강화하였다. 토지조사사업과 산미증식계획으로 농민들의 빈곤이 날이 갈수록 심화되자 일제는 그 원인을 농민의 게으름과 무능함에 있다고 주장하며 농촌진흥운동의 하나로 토지개량운동, 종자개량운동, 퇴비증산운동, 초혜[짚신] 신기 운동, 저축운동 등을 시행하였다. 물론, 이 시기에도 각종 세금과 공출 등 수탈은 철저히 시행되었으며, 강제 징용·징병제를 통해 젊은이들을 노동과 전쟁에 동원하였다. 심지어 여자정신대(女子挺身隊)라는 이름으로 여성들을 군수공장 노동자나 군대 위안부로 끌어가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각종 세금과 공출(供出) 수탈은 철저히 시행하였으며, 이를 원활히 달성하기 위해 온갖 선전과 세뇌교육을 통해 우리의 민족정신을 말살하려 애썼다. 한편 1930년대에는 계속적으로 우리 민족 고유의 흰색 옷을 못 입게 하고 색깔 있는 옷을 입도록 강제하였다.

[행정구역 개편]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예산군, 덕산군, 대흥군이 모두 예산군으로 통합되었다. 이에 따라 대흥군덕산군의 11개 면, 공주군의 일부를 합하여 현재의 예산군이 성립되고 12개 면으로 개편되었다.

예산읍은 금평면과 신창군의 일부를 병합하고 예산의 옛 이름인 임성(任城)의 이름을 따서 임성면으로 했다가 예산면으로 개칭하였으며, 1940년에 예산읍으로 승격하였다. 삽교읍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덕산군이 예산군에 편입되면서 삽교의 이름을 따서 삽교면이 되었다. 고덕면덕산면의 고산면(高山面) 등을 병합하고 고덕신현의 이름을 따서 고덕면이 되었다. 광시면대흥군 이남면(二南面)의 40개 리를 병합하고 광시리의 이름을 따서 광시면이 되었다. 대술면은 술곡면(述谷面)의 30개 리를 병합하고 대지동과 술곡의 이름을 따서 대술면이 되었다. 대흥면대흥면, 근동면(近東面)과 예산군 군내면(郡內面) 일부를 병합하고 대흥군의 이름을 따서 대흥면이 되었다. 덕산면은 나박소면(羅朴所面) 일부와 홍주군 고남하도면(高南下道面) 일부를 병합하고 덕산군의 이름을 따서 덕산면이 되었다. 봉산면덕산군의 일부를 병합하고 봉명산의 이름을 따서 봉산면이 되었다. 신암면은 신종면과 입암면의 이름을 따서 신암면이 되었다. 신양면은 원동면(遠東面)과 근동면, 공주군 신상면(新上面), 예산군 술곡면, 청양군 북하면(北下面) 일부를 병합하고 신양원의 이름을 따서 신양면이 되었다. 오가면은 오원리면과 우가산면의 이름을 따서 오가면이 되었다. 응봉면대흥군 외북면(外北面)과 예산군 우가산면 일부를 병합하고 팔봉산의 이름을 따서 봉산면이라 하였다가 응봉면이 되었다.

[교통과 도시 구조]

1905년 을사보호조약의 체결로 통감정치가 시작되자 일제는 근대적인 도로의 건설에 착수했다. 근대적인 새로운 도로는 기존 역로를 넓히고 바르게 펴며 구배를 줄여 만들었다. 또한 취로사업의 형식을 띠어 반일 민심을 회유하는 데도 이용되었다.

1920년대에 들어 일제는 곡물과 지하자원의 완성품을 팔기 위해 지방의 철도 부설에 힘썼으며, 철도의 보조 교통수단으로 도로[신작로]를 개설하였다. 예산은 충남선[장항선] 철도 개통 이후 교통의 요지 및 농산물의 중심 생산지로서 역할이 증대되면서 대규모 상권이 형성되어 근대도시로 성장하였다.

예산의 도시 형태는 원시가지[현 예산읍내]가 분지형으로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1922년 도시의 서쪽에 경남철도[현 장항선]가 부설되면서 철도 주변에 신시가지가 형성되어 구시가지와 신시가지가 직선형 도로로 이어지는 중심 확산형 도시로 발전하였다. 1927년에는 시가지 구획정리가 어우러져 구시가지의 혼마치[本町通] 4거리를 중심으로 상업 중심의 시가지가 형성되었다. 당시 예산의 구시가지에는 호서은행, 윤창규 상점[석유 도매업], 황학주 상점[포목 직물 잡화업], 진숙 양복점, 대창상점[포목 직물업], 예산상회[포목 직물 잡화업], 삼성상회[무역 및 위탁판매업] 등이 있었으며, 혼마치에는 만복식당[경양식], 동화루·덕성루[중국음식점], 공화동[중국인 잡화상] 등이 있었다.

[인구]

1910년에 예산군, 덕산군, 대흥군 3개 군이 합쳐졌을 때의 인구는 8만 1458명이었다. 그중에는 일본인 465명과 중국인 220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1920년의 예산 인구는 8만 793명으로 충청남도 지역에서는 서산, 공주, 논산, 부여, 천안에 이어 6번째로 인구가 많았다. 1931년의 예산 인구는 9만 8616명으로 늘어났는데, 그중 예산과 삽교는 1만 명 이상이었다. 또한, 이 시기 예산에는 신흥도시로 성장하던 대전에 이어 두 번째로 시가지가 발달되어 있었다.

[산업]

일제강점기 예산의 산업은 농산물 유통을 기반으로 공산품이 유통되었다. 1926년에 생산된 농산물은 미곡 11만 석, 맥류 5만 7000석, 콩류 2만 8000석, 잡곡 5만 5000석, 양잠류 2,500석이었다. 이외에도 면화류와 대마류가 특용작물로 생산되었다. 공산품은 면포 2만 2000정, 마포 1만 6000정, 견포 2만 정, 저포 1만 2000정, 생사(生絲) 2,600관, 광산물, 도자기, 지필(紙筆) 등이 생산되었고, 예산 지역 8개 시장의 판매고는 150만 원 가량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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