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4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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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普陽 |
영어음역 | Jo Boyang |
이칭/별칭 | 인경(仁卿),팔우헌(八友軒)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정명수 |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인경(仁卿), 호는 팔우헌(八友軒). 증조부는 조명한(趙鳴漢), 할아버지는 조봉징(趙鳳徵),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조원익(趙元益), 어머니 예안이씨(禮安李氏)로 이기만(李基晩)의 딸이다. 형 조규양(趙葵陽)과 함께 문장이 뛰어나서 난형난제라 불렸다. 증조부는 김응조(金應祖)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할아버지는 이현일(李玄逸)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예조참판에 증직되었다.
[활동사항]
조보양은 현재의 경상북도 예천군 감천면 둔산리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이경익(李景翼)의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역학계몽(易學啓蒙)』 등 성리서에 정통하였으며 이산두(李山斗)에게도 질의하였다. 또 당시 학자로 명성이 높던 권상일(權相一)의 문하에서 사서육경(四書六經), 『주자문집(朱子文集)』, 『퇴계문집(退溪文集)』, 상수학(象數學) 등을 배울 때 크게 인정을 받았다.
1747년(영조 23) 생원과 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1773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이 되고 예조좌랑(禮曺佐郞)이 되었으나, 예조참판 정후겸(鄭厚謙)이 참알(參謁)할 때 나와 보지 않았다는 이유로 종을 매질하자 벼슬을 내놓고 예천으로 돌아갔다. 귀향 후 현재의 감천면 돈산리에 천곡서당(泉谷書堂)을 세우고 후진을 양성하였다. 청빈한 벼슬 생활을 하는 한편, 덕행과 효행을 실천하고, 연구에 몰두하여 후진의 본보기가 되었으며 박손경(朴孫慶), 이상정(李象靖), 정범모, 이상진(李象辰) 등과 교류하였다. 1781년(정조 5) 3월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에 제수되었고, 4월에 병조좌랑(兵曹佐郞)에 부임하자마자 바로 다시 돌아왔으며, 1788년(정조 12) 수직으로 통정대부에 가자되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겸 오위장(五衛將)을 제수받았다.
[저술 및 작품]
문집으로 7권 4책의 『팔우헌집(八友軒集)』이 있다.
수정일 | 제목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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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29 | 내용 수정 | [활동사항] 1747년(영조 23) 생원과 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1773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성균관전적, 사헌부감찰, 병조좌랑을 거쳐 예조좌랑이 되었으나 정후겸(鄭厚謙)에게 거슬림을 당해 벼슬을 버리고 예천으로 돌아갔다. 귀향 후 현재의 감천면 돈산리에 천곡서당(泉谷書堂)을 세우고 후진을 양성하였다. 청빈한 벼슬 생활을 하는 한편, 덕행과 효행을 실천하고, 연구에 몰두하여 후진의 본보기가 되었으며 박손경(朴孫慶), 이상정(李象靖), 정범모, 이상진(李象辰) 등과 교류하였다. 1788년(정조 12) 첨지중추부사와 오위장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 1747년(영조 23) 생원과 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1773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이 되고 예조좌랑(禮曺佐郞)이 되었으나, 예조참판 정후겸(鄭厚謙)이 참알(參謁)할 때 나와 보지 않았다는 이유로 종을 매질하자 벼슬을 내놓고 예천으로 돌아왔다. 귀향 후 현재의 감천면 돈산리에 천곡서당(泉谷書堂)을 세우고 후진을 양성하였다. 청빈한 벼슬 생활을 하는 한편, 덕행과 효행을 실천하고, 연구에 몰두하여 후진의 본보기가 되었으며 박손경(朴孫慶), 이상정(李象靖), 정범모, 이상진(李象辰) 등과 교류하였다. 1781년(정조 5) 3월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에 제수되었고, 4월에 병조좌랑(兵曹佐郞)에 부임하자마자 바로 다시 돌아왔으며, 1788년(정조 12) 수직으로 통정대부에 가자되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겸 오위장(五衛將)을 제수받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