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4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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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宜陽 |
영어음역 | Jo Uiyang |
이칭/별칭 | 의경(義卿),오죽재(梧竹齋)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황만기 |
[정의]
조선 후기 안동 지역에서 활동한 문신.
[가계]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의경(義卿), 호는 오죽재(梧竹齋). 아버지는 조원익(趙元益), 어머니는 예안이씨(禮安李氏)로 이기만(李基晩)의 딸이다. 아버지 조원익은 문행(文行)으로 향리에서 중망을 받았다.
[활동사항]
조의양은 현재의 경상북도 예천군 감천면 둔산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대답에 막힘이 없어 농은(農隱) 이급(李級)이 박아군자(博雅君子)라 칭하기도 하였다. 눌은(訥隱) 이광정(李光庭)을 찾아가 경사(經史)를 강론하였으며 시작(詩作)에 대해서는 의고악부(擬古樂府)와 건안칠자(建安七子)의 시 체제를 수용하였다. 20세에 도산서원(陶山書院)을 찾아가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유풍(遺風)을 보고는 이수연(李守淵)을 찾아가 가학(家學)을 전해 들었다.
조의양은 중년에 향산동(香山洞)에 살면서 봉황성(鳳凰城) 아래에 오죽재(梧竹齋)를 짓고 자호로 삼았다. 1771년(영조 47)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온계(溫溪) 이해(李瀣)의 시호를 청하는 소를 올렸다. 아버지 조원익이 84세인데 형제 4인이 백수청삼(白首靑衫)으로 즐기니 향리가 환영하였다. 조정에 경사가 있어 진수성찬을 차리니 임금이 특명으로 첨지중추부사를 명하였고 1807년(순조 8) 동지중추부사에 특승(特陞)하였다.
[학문과 사상]
조의양은 『주역(周易)』에 대해서는 매일 한 편씩 읽기를 수십 년을 계속했는데 특히 맏형인 조규양(趙葵陽)이나 둘째 형 조보양(趙普陽)과는 매일 함께 강설하였다. 또 해좌(海左) 정범조(丁範祖)와 간옹(艮翁) 이몽서(李夢瑞)와 특히 가깝게 지내면서 시로써 교유하여 후세 사람들은 이들 세 사람을 안동의 대표적 시인으로 손꼽기도 하였다. 만년에는 주자(朱子)와 퇴계를 존모하여 양현의 시에 차운한 것이 많았으며 와설(臥雪) 이상경(李尙慶), 허주(虛舟) 이종악(李宗岳), 남병(南屛) 정박(鄭璞) 등 안동의 시인들과 함께 시회(詩會)를 열기도 하였는데 정박은 “우리가 죽은 후에는 안동의 풍류가 쓸쓸하리라.”라고 하였다.
[저술 및 작품]
문집으로 『오죽재집(梧竹齋集)』 6권 3책이 있다.
[묘소]
묘소는 경상북도 예천군 하리면 부용산(芙蓉山)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