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0378 |
---|---|
한자 | 貢稅串倉 |
영어공식명칭 | Gongsegotchang |
이칭/별칭 | 공세곶이,공세창,공진창,아산창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박범 |
개정 시기/일시 | 1523년 - 공세곶창 20칸 창고 신축으로 80칸 창사 마련 |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895년 - 공세곶창 자리에 공세리성당 건립 |
관할 지역 | 공세곶창 -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 |
[정의]
조선시대 세금으로 바쳐진 곡식의 수송 및 보관을 위해 현재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에 설치했던 창고.
[개설]
공세곶창(貢稅串倉)은 충청도의 세곡을 모아 보관하였다가 서울로 운송하는 역할을 하던 조선 전기 전국 9대 조창(漕倉) 중 한 곳으로 공세곶이[貢稅串], 공세창(貢稅倉), 공진창(貢津倉), 아산창(牙山倉)이라고도 불렸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기록된 9개 조창은 아산의 공세곶창, 충주의 가흥창(可興倉), 함열의 덕성창(德成倉), 나주의 영산창(榮山倉), 영광의 법성포창(法聖浦倉), 원주의 흥원창(興原倉), 춘천의 소양강창(昭陽江倉), 배천의 김곡포창(金谷浦倉), 강음의 조읍포창(助邑浦倉)이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운(漕運) 제도는 10세기 초 고려 정종 때 도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 고려 조정은 재정 기반을 충실히 하기 위해 조운 제도를 정비하였고, 아주(牙州) 하양창(河陽倉)을 비롯해 12개 조창[추후 1개가 추가되어 13개 조창]이 설치되었다. 당시 조창은 주로 연해안에 설치되어 조세의 수납뿐만 아니라 보관, 운반도 담당하였다. 그러나 고려 후기 정치가 어지러워지고 왜구가 창궐하자 안전을 위협받아 수로를 이용하기 어려워졌다. 결국 고려 왕실은 수운을 포기하고 육운을 이용하여 조창이 폐지되기도 하였다.
조선 건국 이후 사회가 안정되자 조운 제도가 복구되었다. 공세곶창은 조선의 조운 체제 구축을 위해 아산만에 설치되어 충청남도 일원의 세곡을 수납, 운반하는 역할을 하였다.
[관련 기록]
『세종실록지리지』 「충청도조(忠淸道條)」와 『경국대전』 호전(戶典)의 「조전조(漕轉條)」에서 관련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내용]
『세종실록지리지』 「충청도조」에 "공세곶은 아산현(牙山縣) 서쪽 8리[약 3.2㎞]에 있다. 본주 및 청주(淸州), 목천(木川), 전의(全義), 연기(燕岐), 온수(溫水), 신창(新昌), 은진(恩津), 연산(連山), 회덕(懷德), 공주(公州), 정산(定山), 회인(懷仁), 천안(天安), 진잠(鎭岑), 이산(尼山), 문의(文義)의 구실[예전에 온갖 세납을 통틀어 이르던 말]은 모두 이곳에 바쳐서 범근천을 지나 서해를 거쳐서 서강에 닿았는데, 물길이 500리[약 200㎞]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경국대전』 호전 「조전조」에 "아산의 공세곶창에서는 충청도의 조세를 받아들이고, 충주의 가흥창에서는 충청도·경상도의 조세를 받아들인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변천]
공세곶창이 처음 설치된 시기는 조선 세종 때였다. 당시 면천(沔川)은 범근천(犯斤川), 직산(稷山)은 경양포(慶陽浦), 충주는 금천(金遷)·앙암(仰巖)에 세곡을 모아 운송하였다. 그러나 기존 조창 인근의 물길이 얕아지고 갯벌이 쌓이면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는 등 갖가지 문제가 생기면서 1478년(성종 9) 경기도 일부와 충청도 약 40여 고을의 세곡을 모두 공세곶으로 수납, 운송하도록 하였다. 이 시기에는 창고도 없이 연해안 포구에 세곡을 노적(露積)[곡식 따위를 한데에 수북이 쌓음]하였다가 배에 실어 운송하였다. 그러다가 1523년(중종 18) 20칸의 창사(倉舍)를 신축하고 총 80칸의 창사가 마련되어 명칭을 ‘공진창’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조선의 조운 체제는 이때를 기점으로 운영이 부실해졌다. 국가가 직영하던 관선(官船) 조운 체제가 부실해져 사선(私船)들이 세곡 운송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40여 고을을 헤아리던 공진창에 수납하던 고을도 16세기에 들어서는 아산, 목천, 연기, 천안, 온양, 전의, 청주 등 7개로 한정되었으며, 16세기 말에는 청주가 빠져 6개가 되기도 하였다. 수송 책임자 역시 처음에는 해운판관(海運判官)이었다가, 조선 후기에는 충청감영의 도사(都事), 1762년(영조 38) 이후로는 아산현감(牙山縣監)이 맡았다.
19세기에는 조창 자체가 혁파되어 기능을 잃었다. 공세곶창이 있던 자리에는 조창이 없어지고 1895년(고종 32) 6월 에밀 피에르 드비즈[성일론(成一論)] 신부가 공세리성당을 설립하였다. 이후 공세리성당은 1922년 고딕 건축 형식을 모방한 2층 건물로 형태를 바꾸었다.
[의의와 평가]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는 간척 사업의 결과로 내륙이 되었지만, 조창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공세리가 아산천과 삽교천이 만나 아산만으로 나아가는 해상교통의 요충지였음을 알려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