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14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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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救-李舜臣-洪可臣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제장명 |
[정의]
충청남도 아산시의 대표적인 역사 인물로 임진왜란 시기 나라를 구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이순신과 홍가신의 이야기.
[아산의 인물, 이순신과 홍가신]
이순신(李舜臣)[1545~1598]과 홍가신(洪可臣)[1541~1615]은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웠으며, 충청남도 아산시에서 자랑하는 대표적인 역사 인물이다. 이순신은 한성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 아산으로 이사 온 이후부터 계속 아산을 본향으로 삼으면서 살았다. 그리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시기 큰 활약을 하여 선무일등공신(宣武一等功臣)으로 추앙받았으며, 순국한 후에는 아산에서 영면하고 있다. 홍가신은 아산에서 태어난 후 줄곧 아산에 터전을 두고 살았다. 임진왜란 중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평정한 공을 인정받아서 청난일등공신(淸難一等功臣)으로 선정되었다. 이순신과 홍가신은 임진왜란 시기 호성공신(扈聖功臣), 선무공신(宣武功臣), 청난공신(淸難功臣) 중 선무와 청난의 일등공신이라는 점이 매우 독특하고 두 명의 일등공신이 모두 아산 출신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이순신의 생애와 활약상]
이순신은 1545년(인종 원년) 3월 8일[양력 4월 28일] 한성부 건천동[현재 서울특별시 중구 인현동]에서 아버지 이정(李貞)과 어머니 초계변씨(草溪卞氏)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2세 정도 될 무렵에 어머니의 고향인 충청도 아산으로 이사를 한 후 줄곧 이곳에서 성장하였다. 이순신은 어릴 때 문관의 꿈을 키웠지만 21세에 결혼을 한 후 이듬해부터 말타기와 활쏘기 등 무예를 익혀 32세 때인 1576년(선조 9)에 식년무과(式年武科)에 급제하였다. 그 후 함경도 동구비보(童仇非堡)의 권관(權管)으로 첫 관직 생활을 시작으로 22년간 무관 생활을 하였다.
이순신은 북방과 남방을 왕래하면서 육군직과 수군직, 지방행정조직의 수장 등 다양한 직책을 수행하면서 공직자로서의 직분에 충실하였다. 이순신은 육군직에 근무하던 중 함경도 건원보(乾原堡)의 권관 시절에는 울지내(鬱只乃)[우을기내(于乙其乃)]라는 여진족의 소두목을 사로잡은 경험도 있으며, 1588년(선조 21) 2월에 있었던 시전부락(時錢部落)의 여진족 토벌 작전에 참가하여 공을 세운 적도 있다. 수군직에 대한 경험은 36세 때인 1580년(선조 13) 발포(鉢浦)[현재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 발포리] 수군만호(水軍萬戶)로 첫 인연을 맺었으며, 1586년(선조 19) 함경도의 유일한 수군직인 조산보(造山堡) 만호직을 수행하면서 수군에 대한 전문성과 경험을 쌓아 나갔다. 한편으로 이순신은 무장이었지만 정읍현감과 태인현감직을 수행하면서 목민관으로서의 임무도 충실히 수행하여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다.
일본과 전운이 감돌기 시작한 1591년(선조 24) 2월 유성룡(柳成龍)의 천거로 전라좌도수군절도사에 임명되었다.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부임한 후 이순신은 유비무환의 자세로 주력 전투선인 판옥선(板屋船)을 정비하고, 신형 전투선인 거북선[귀선(龜船)]을 창제(創製)하는 등 전쟁 대비에 힘썼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시작되자 준비된 전력으로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한산도대첩 등 수많은 해전에서 연전연승함으로써 왜군의 수륙병진 전략을 분쇄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리고 1593년(선조 26) 전공을 인정받아 전라좌수사 겸 초대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한산도에 주둔하면서 왜군의 서진을 철저하게 막았다.
이순신은 1597년(선조 30) 왜군의 간계와 조정의 그릇된 판단으로 통제사직에서 파직된 후 투옥되었다가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 휘하에서 백의종군을 하였다. 그 후 칠천량해전에서 2대 통제사 원균(元均)이 전사하자 후임으로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수군을 정비한 후 명량해전에서 승리하였다.
명량해전에서는 승리했지만 13척밖에 남아 있지 않은 전선으로는 전투를 수행할 수 없다고 판단한 이순신은 수군 재건에 매진하였다. 목포 고하도에서 1차적으로 수군을 재건하고, 1598년(선조 31) 완도 고금도에서 수군 재건을 완료하였다. 1598년 7월에 도착한 명나라 수군과 연합작전을 효율적으로 수행하여 절이도해전과 예교성[왜성(倭城)] 수륙합공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왜군과 싸우다가 마침내 1598년 11월 19일 아침 노량해전에서 적을 크게 물리치고는 적탄에 맞아 54세로 전사하였다.
이순신이 지휘한 조선 수군은 7년 전쟁 동안 총 50여 회의 해전을 치르면서 700여 척의 적선을 분멸시켰다. 이런 전공을 인정받은 이순신은 1604년(선조 37) 10월 선무일등공신에 녹훈되었으며, 덕풍부원군(德豐府院君)의 작호(爵號)를 받았다. 이순신은 전쟁을 수행하는 와중에도 백성을 보살피는 데 소홀하지 않았다. 전공을 세워 무공을 드러내는 것보다 백성의 안위를 우선시하는 이순신의 정신은 민족의 정신 속에 길이 전승되어 왔다.
[홍가신의 생애와 활약상]
아산을 빛낸 또 한 명의 일등공신인 홍가신은 1541년(중종 36)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대동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장원서장원(掌苑署掌苑)을 지낸 홍온(洪昷)이고, 어머니는 군수 신윤필(申允弼)의 딸이다. 처음에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이후 민순(閔純)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67년(명종 22) 진사시에 입격(入格)하였으나, 과장(科場)에서 징계를 받은 적이 있어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성리학에 몰두하였다. 1571년(선조 4) 음직(蔭職)[과거를 거치지 아니하고 조상의 공덕에 의하여 맡은 벼슬]으로 강릉참봉에 임명되어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574년(선조 7) 부여현감으로 있을 때는 백성을 잘 다스렸는데, 그 뛰어난 재주를 인정받아 예빈시주부(禮賓寺主簿)에 특진되었고, 이어 형조좌랑·지평을 거쳐 1584년(선조 17) 안산군수를 지냈다. 1588년(선조 21) 수원부사로 있을 때 구황(救荒)의 공이 있어 표창을 받았으나, 평소에 정여립(鄭汝立)과 가까이 지낸 이유로 1589년(선조 22) 정여립의 모반 사건 때 파직을 당하였다.
1593년(선조 26) 파주목사를 지낸 후 1594년(선조 27) 1월 아산에 피난해 있었는데, 그때 송유진(宋儒眞)이 난을 일으킬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정보를 알게 된 후 이를 영의정 유성룡에게 전해 주었다. 이 공로로 1월 21일 홍주목사에 임명되었다. 홍주목사로 있을 때인 1596년(선조 29) 7월 임진왜란 시기 최대의 반란인 이몽학의 난이 일어났다. 이때 홍가신은 이몽학의 난을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몽학은 본래 왕실의 서얼 출신으로, 아버지에게 쫓겨나 충청도·전라도 등지를 전전하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모속관(募粟官) 한현(韓絢)의 휘하에서 활동하였다. 이몽학은 반란을 일으키기 얼마 전부터 한현과 함께 홍산[현재 부여군] 무량사(無量寺)에서 모의를 하고 군사를 조련하였다. 또한 ‘동갑회(同甲會)’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해 친목회를 가장한 반란군 규합에 열중하였다. 이때 한현이 아버지의 상을 당해 홍주[현재 홍성군]로 내려가면서 이몽학에게 먼저 거사할 것을 이르고 자신은 내포(內浦)로부터 상응할 것을 약속하였다.
이몽학은 김경창(金慶昌), 이구(李龜), 장후재(張後載), 도천사(道泉寺) 승려 능운(凌雲), 사노(私奴) 팽종(彭從) 등과 함께 홍산 쌍방축(雙防築)에 주둔하였는데, 승속군(僧俗軍)이 무려 600~700명이었다. 1596년 7월 6일 이몽학 일당이 야음을 타고 홍산현을 습격해 현감 윤영현(尹英賢)을 붙잡았다. 이어 임천군을 습격해 군수 박진국(朴振國)을 납치하였으며, 7월 7일에는 정산현, 7월 8일에는 청양현, 7월 9일에는 대흥군을 함락하였다. 이와 같이 수령들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해 항복하거나 도주하고, 이민(吏民)[지방 아전과 백성]들도 모두 반군에게 복종하여 그 무리가 수만 명에 달하게 되었다.
이몽학은 대흥군을 함락한 날에 홍주를 침범하였다. 당시 홍주목사였던 홍가신은 주관속(州官屬) 이희(李希)와 신수(申壽)를 반군 진영에 보내어 거짓 투항하게 함으로써 방어 준비를 갖출 수 있는 시간을 얻는 한편, 고을에 사는 무장 박명현(朴名賢)·임득의(林得義) 등을 기용하는 등 많은 무사들을 모이게 하였다. 체찰사(體察使) 종사관 신경행(辛景行)도 인근 수령에게 전령해 구원을 청하였다. 수사(水使) 최호(崔湖)도 군사를 이끌고 입성함으로써 홍주성의 수성 계획은 완전히 갖추어졌다. 이후 반란군과 맞서 싸우는 동안 충청병사(忠淸兵使) 이시언(李時言)이 홍주로 향해 무량사에 이르렀고, 순안어사(巡按御史) 이시발(李時發)은 유구에, 중군(中軍) 이간(李侃)은 청양에 포진해 장차 홍주로 향하려는 군사의 위세를 떨쳤다.
이몽학은 성의 함락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7월 11일 새벽에 무리를 이끌고 덕산을 향해 달아났는데, 반란군 중에 도망자가 속출하였다. 이때를 이용해 홍가신은 반란군 진영에 무사를 보내어 혼란시키면서, 이몽학의 목을 베는 자는 반란에 가담하였다 하더라도 큰 상을 내리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반란군 중에서 다투어 이몽학의 목을 먼저 베려는 자가 속출하였고, 결국 김경창 등에 의해 이몽학은 참수되었다. 당시 한현은 반군 수천 명을 이끌고 홍주에 주둔하고 있었으나, 홍가신의 진군으로 패주하다 사로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당시 상황을 되짚어 보면, 홍주성에 상주하는 경비 군사는 일백 명이 채 안 되었고, 반면 나날이 불어난 이몽학의 반란군 세력은 이미 일만 명에 이르렀다. 이처럼 위급한 상황에서 홍가신은 아산에 거주하고 있는 자신의 가족들을 모두 불러들여 결사항전의 의지를 보였다. 그러자 민관군은 점차 안정을 찾고 인근 충청수영성(忠淸水營城)과 관리들의 합심으로 결연한 마음가짐을 갖게 되었다. 반군은 홍주성에서 대치하던 중, 속속 합류하는 지원군과 내부 반란에 지리멸렬하게 되었고, 결국 진압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홍주목사 시절 이몽학의 난을 진압한 홍가신은 1604년 이몽학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청난공신 1등에 책록되었으며, 이듬해 영원군(寧原君)에 봉해졌다.
[이순신과 홍가신의 관계]
이순신과 홍가신은 여러모로 공통점이 많다. 먼저 이순신과 홍가신 둘 다 목민관으로서의 능력을 보여서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는 점이다. 이순신의 경우 정읍현감과 태인현감으로 있으면서 백성을 잘 다스렸다. 홍가신도 부여현감 시절 백성들의 어려움을 알아서 그 고충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강구하여 시행하였다.
또 하나의 공통점은 둘 다 유성룡과 친구 사이였으며 유성룡의 천거를 받았다는 점이다. 유성룡과 이순신은 어릴 때 친구 사이였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천거한 사람도 유성룡이었으며, 이후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이순신과 교류를 자주 하였다. 유성룡과 홍가신도 서울에서 청년 시절을 함께 보낸 이력을 지니고 있다. 이때 유성룡과 홍가신은 서울에 와 잠시 벼슬하고 있던 이황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한 적이 있다. 따라서 유성룡이 쓴 부여의 「의열사기(義烈祠記)」에서 ‘나의 벗[余友)]’이라고 홍가신을 칭한 적도 있을 정도이다. 홍가신이 홍주목사에 임명된 것도 유성룡의 천거에 힘입은 바가 크다.
이순신과 홍가신은 사돈 관계를 맺었다. 홍가신의 넷째 아들이 초취(初娶)[첫 번째 장가가서 맞이한 아내]로 한백겸(韓百謙)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후사가 없자[신행(新行) 전에 친정에서 사망] 이순신의 딸을 계실(繼室)로 맞아 4남 1녀를 두었다. 홍가신의 아들 홍비(洪棐)는 이순신의 사위가 되었다. 둘 사이의 사돈 관계는 이순신 사후에 이뤄졌는데, 이는 이순신과 홍가신을 잘 알고 있는 유성룡이 주도하여 맺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사돈 관계를 좀 더 확대해 본다면 이순신의 장인인 방진(方震)의 처, 즉 이순신의 장모가 바로 남양홍씨(南陽洪氏)이다. 이순신은 보성군수를 지낸 방진의 딸, 즉 장모 남양홍씨의 딸에게 장가를 들었다. 또 이순신 자신의 딸은 남양홍씨 홍가신의 아들 홍비에게 출가를 시켰다. 이러한 사실도 매우 뜻깊은 인연이다.
이순신과 홍가신은 임진왜란 시기 나라를 구한 역사적 인물 중 가장 주목받는 인물일 뿐만 아니라, 아산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는 만큼 이순신과 홍가신에 대한 활발한 선양 사업이 아산시에서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