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05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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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牙山大潤寺石造彌勒菩薩立像 |
영어공식명칭 | Stone Standing Maitreya Bodhisattva of Daeyunsa Temple, Asan |
이칭/별칭 | 대윤사 미륵불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물/불상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현대로 888[해암리 308] |
시대 | 고려/고려 |
집필자 | 천경석 |
이전 시기/일시 | 1987년 3월 - 아산 대윤사 석조미륵보살입상 이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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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복원 시기/일시 | 1995년 6월 1일 - 아산 대윤사 석조미륵보살입상 대윤사 대각전 봉안 |
현 소장처 | 대윤사 -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현대로 888[해암리 308] |
원소재지 | 아산 대윤사 석조미륵보살입상 -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해암리 380-1번지 |
성격 | 불상 |
재질 | 화강석 |
크기(높이) | 252㎝[높이]|62~75㎝[너비]|약 80㎝[보관 포함 머리 부분] |
소유자 | 대윤사 |
관리자 | 대윤사 |
[정의]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해암리 대윤사에 있는 고려시대 추정 석불.
[개설]
아산 대윤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흔히 미륵불(彌勒佛)이라 부르며, 이 불상을 모시기 위해 1990년대 초에 창건된 대윤사의 주불(主佛)로 모셔지고 있다. 30여 년 전 대윤사 창건에는 불심이 깊은 아버지와 아들의 사연이 얽혀 있다. 아버지는 인주면 해암리 사람이며 충청남도 공주시에 있는 마곡사로 출가해서 ‘대윤(大潤)’이라는 이름으로 6개월간 행자(行者) 생활을 하다 환속하였는데, 미륵불이 집 앞 논에 서 있는 것이 못내 송구스러워서 어디엔가 잘 모시고 싶어하였다. 한의사로서 효성과 불심이 지극했던 아들 배오성은 아버지의 뜻을 받들기 위해 지금의 대윤사 자리의 토지를 희사하고, 1987년 3월 미륵불을 먼저 옮겨서 모셔 놓았다. 여러 해에 걸쳐 준비하고 절을 짓는 과정에서 미륵불이 도난을 당했고, 3년간 고생을 한 끝에 국회의원을 지냈다는 어떤 부자의 별장에서 미륵불을 찾아서 모셔왔다. 1995년 6월 1일 지금의 대윤사 대각전(大覺殿)을 완성하고 그 안에 주불로 모시게 되었다.
[위치]
아산 대윤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해암3리 대윤사의 본전인 대각전에 모셔져 있다. 지방도 624호선 현대로를 따라 서쪽으로 가다 해암리의 미진무지개아파트단지를 지나 북서쪽으로 250m 간 지점의 작은 고갯마루에서 오른쪽 샛길을 따라 다시 250m쯤 올라가면 대윤사에 이르게 된다.
[형태]
아산 대윤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하나의 화강석으로 조성하였으며 높이 252㎝, 너비 62~75㎝이다. 자연석 받침돌 위에 서 있으며 예전부터 있던 받침돌이라 한다. 보관(寶冠)을 포함한 머리 부분은 약 80㎝로서 몸에 비해 상대적으로 크게 느껴진다.
상호(相好)는 전체적으로 풍만하고 넉넉한 느낌을 주며 코는 작은 편이고, 입가에는 미소가 표현되어 있다. 미간의 백호(白毫)는 없고, 귀는 적절한 크기이며 귓바퀴가 보기 좋게 늘어져 있다. 목이 상당히 굵고 삼도(三道)[불상 목 주위에 표현된 3개의 주름으로, 생사를 윤회하는 인과(因果)를 나타냄]는 없다. 법의(法衣)는 양어깨를 덮고 길게 내려뜨려진 통견(通肩)이지만 어깨 부분에는 옷 주름이 거의 표현되어 있지 않고 가슴에 매듭이 있다. 옷 주름은 좌우 양옆의 팔꿈치 아랫부분에 여러 줄의 무늬를 수직으로 나란히 길게 표현하여 도식적인 느낌이다.
손은 큰 편이며 수인(手印)[양쪽 손가락으로 나타내는 모양]은 시무외여원인(施無畏與願印)인데, 일반적인 경우와는 좌우가 바뀌어 있다. 왼손은 가슴 앞에 손바닥이 보이도록 하였고 가운데에 보주(寶珠)가 있으며, 오른손은 아래로 내리고 배 앞에서 역시 손바닥이 보이도록 하였다. 왼손 엄지손가락 일부는 손상되어 있다. 시무외여원인이란 모든 중생의 두려움과 고난을 없애주고 중생의 모든 소원을 들어주어 부처의 자비를 보여준다는 수인으로 오른손을 들어 펴 보이고 왼손을 아래로 향하는 모양이다.
머리에는 산 모양의 삼산관(三山冠)이 변형된 형태의 간략한 보관을 쓰고 있어서 보살상임을 알 수 있으나 존명(尊名)은 파악되지 않는다. 보관 위에 갓을 올린 것은 후대의 일이며, 얇고 넓은 자연석 판석을 대략 네모 형태로 다듬어 올리고 그 위 가운데에 둥근 돌을 얹어 갓 모양으로 만들었다. 후대에 추가로 올린 갓은 바위 이끼가 많이 끼어 변색되어 있으나, 미륵불상은 전체가 최근에 조성한 것처럼 깨끗하다. 도난되었을 당시에 절도범 혹은 매수자가 표면을 빡빡 밀어냈기 때문이다.
[특징]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해암3리는 큰 절이 있던 곳이라는 의미의 한잣골[한절골, 대사동(大寺洞)]인데, 절 자리는 대윤사 북서쪽 직선거리 500여m 지점, 지금의 해암3리마을회관 북서쪽 산자락 일대로 추정된다. 그 절과 아산 대윤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의 직접적 관련 사실은 확인되지 않는다.
지명 자체가 ‘한절골’이라 함은 옛날에 절터였던 자리로 절도 크고 넓었을 것으로 추측하게 한다. 이 절에는 「한절불 전설」이 내려온다. 아주 오랜 옛날에 젊은 부부가 이곳 한절에서 간절히 기도해서 아이를 가졌는데 어머니는 아이를 낳은 뒤 앓다가, 아버지는 아이 여덟 살 때 세상을 떠났다. 아이가 자라 부모의 은혜를 갚고 명복을 빌기 위해 정성껏 이 미륵불을 깎아 세웠다는 이야기이다. 또 다른 전설도 있다. 옛날에 이 마을 일대를 차지한 부자가 절을 없애버리는 바람에 스님들이 쫓겨날 때 곡교천을 건너가면서 부처님이 마을을 등지게 돌려놓고 가버렸다고 한다. 그 뒤부터 마을에 좋지 않은 일이 자주 생기게 되어 마을 사람들이 매년 음력 정월에 제사를 지내 왔다는 전설이 있다. 수백 년 동안 마을의 수호신으로 받들어졌고, 몇십 년 전에는 기와를 얹은 벽돌집으로 ‘당집’을 지어 모시기도 했었는데 현재는 당집도 무너져 버렸다고 한다.
아산 대윤사 석조 미륵보살입상은 본래 대윤사 남서쪽, 즉 곡교천 방향 직선거리 380m 지점의 논에 서 있었다. 인주면 해암리 380-1번지이다. 지금의 곡교천 제방에서는 직선거리 340m쯤 되는 곳이며, 대략 남서쪽을 바라보며 서 있었는데, 간척되지 않은 옛날 기준으로는 곡교천 하구 일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을을 등지는 셈이어서 돌려 세웠다는 전설이 생겼을 것이다.
[의의와 평가]
조선시대에 하류 구간을 중심으로 불렀던 곡교천의 이름이 ‘미륵천(彌勒川)’이었다. 바로 아산 대윤사 석조미륵보살입상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곡교천 하구 일대는 아산만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이어서 주민들은 바닷가로 인식하였다. 홍수나 해일로 인한 피해를 막고, 풍요와 뱃길의 안전을 기원하며 미륵불상을 세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풍수지리로 보면 비보(裨補)[풍수적으로 결함이 있는 기존의 땅을 고쳐서 길지로 바꾸어 주는 것] 차원에서 조성된 불상일 수도 있다.
아산 대윤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고려시대 불상으로 추정되는 중요한 불상이지만 아직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지 않다. 문화재 지정 추진을 위한 조사는 2014년에 모두 마쳤으나, 불이익을 염려하는 주민들의 여론을 고려해서 보류하고 있다. 보존 상태도 매우 양호하고 예술성과 함께 여러 가지 소중한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하루빨리 문화재로 지정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