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06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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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洪重徵 |
영어공식명칭 | Hong Jungjing |
이칭/별칭 | 중흠(重欽),석여(錫余),오천(梧泉)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읍 세교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선명 |
출생 시기/일시 | 1682년 - 홍중징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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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713년 - 홍중징 증광문과 갑과로 급제, 군자감직장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715년 - 홍중징 전적, 병조좌랑, 지평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717년 - 홍중징 용인현감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728년 - 홍중징 장령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729년 - 홍중징 분무원종공신에 녹훈 |
활동 시기/일시 | 1733년 - 홍중징 순천진 병마첨절제사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738년 - 홍중징 제주목사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741년 - 홍중징 형조참의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743년 - 홍중징 병조참지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747년 - 홍중징 승지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749년 - 홍중징 한성부우윤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751년 - 홍중징 형조참판, 호조참판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753년 - 홍중징 지중추부사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754년 - 홍중징 공조판서에 임명, 기로소에 들어감 |
활동 시기/일시 | 1761년 - 홍중징 숭록대부, 치사봉조하에 임명 |
몰년 시기/일시 | 1761년 - 홍중징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765년 - 홍중징 양효 시호를 받음 |
추모 시기/일시 | 1968년 - 홍중징 신도비 건립 |
추모 시기/일시 | 1982년 - 홍중징 사상홍공중징입청금안비 건립 |
거주|이주지 | 거주지 -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읍 세교리 |
묘소|단소 | 홍중징 묘 -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읍 세교리 22-1 |
묘소|단소 | 홍중징 신도비 -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읍 휴대세교길 257-20[세교리 산 24] |
묘소|단소 | 홍중징 사상홍공중징입청금안비 - 제주특별자치시 제주시 서문로 43[용담1동 298-8] |
성격 | 문관 |
성별 | 남 |
본관 | 풍산 |
대표 관직|경력 | 공조판서 |
[정의]
조선 후기 학자이자 문신으로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읍의 풍산홍씨 입향조.
[개설]
홍중징(洪重徵)[1682~1761]은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읍 세교리에 들어와 풍산홍씨(豊山洪氏) 입향조(入鄕祖)가 되었다. 글씨와 문장이 뛰어났고 경사(經史)에 두루 능통했으며, 『주역』에 조예가 깊었다.
[가계]
홍중징의 본관은 풍산(豊山), 초명(初名)은 중흠(重欽), 자는 석여(錫余), 호는 오천(梧泉)이다. 고조할아버지는 대사헌 문경공(文敬公) 홍이상(洪履祥)이며, 증조할아버지는 통정대부(通政大夫)로 남원부사를 지낸 홍탁(洪𩆸)이다. 할아버지는 양성현감을 지낸 홍주천(洪柱天)이며, 아버지는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를 지낸 정익공(貞翼公) 홍만조(洪萬朝)이다.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로 증(贈) 참의(參議) 권진(權瑱)의 딸이다. 홍만조의 4남 2녀 중 넷째 아들이다. 처는 동래정씨(東萊鄭氏)로 정주의 딸이다.
[활동 사항]
홍중징은 1711년(숙종 37) 식년시(式年試) 진사과에 입격(入格)한 뒤 1713년(숙종 39)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하여 군자감직장(軍資監直長)에 처음 제수되었다. 1715년(숙종 41) 전적(典籍)·병조좌랑(兵曹佐郞)·지평(持平), 1717년(숙종 43) 용인현감을 역임하고 1728년(영조 4) 장령(掌令)에 제수되었다. 1728년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토벌할 계책을 올려 이듬해에 분무원종공신(奮武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되었다.
1733년(영조 9) 순천진(順天鎭)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 1738년(영조 14) 제주목사, 1741년(영조 17) 형조참의(刑曹參議), 1743년(영조 19) 병조참지(兵曹參知), 1747년(영조 23) 승지, 1749년(영조 25)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1751년(영조 27) 형조참판·호조참판에 올랐다. 그 후 1753년(영조 29) 노인직(老人職)으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1754년(영조 30) 공조판서에 올랐으며, 이때 기로소(耆老所)에 들었다. 1760년(영조 36) 79세 때에 영조가 사직을 허락하며 손수 글을 써서 포장(褒奬)[칭찬하여 장려함]하였다. 80세가 되어 정1품 숭록대부(崇錄大夫)에 올랐고, 치사봉조하(致仕奉朝賀)에 제수되었으며 1761년(영조 31) 사망하였다.
홍중징이 아산시 배방읍 세교리에 들어온 시기와 사유는 불명확하다. 일부에서는 홍중징의 아버지인 홍만조를 입향조로 보고 있으나, 홍만조는 배방에 거주한 적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홍만조와 홍중징의 묘가 배방읍 세교리의 같은 장소에 있는데, 이는 사패지(賜牌地)이기 때문이다. 홍중징은 세교리에 거주하였고, 홍중징의 아들 홍순보(洪純輔) 때에 회룡리로 이주하였다. 이후 홍중징의 맏형인 홍중형(洪重亨)의 현손(玄孫) 홍희빈(洪羲賓)이 다시 세교리로 들어왔으며, 후손들은 스스로 만퇴공파(晩退公派)로 칭하기도 한다. 이와 구분하여 홍중징의 후손들을 봉조하공파(奉朝賀公派)로 칭하기도 한다. 풍산홍씨 후손들은 배방읍 세교리와 회룡리를 세거지로 하여 인근의 천안시와 당진시, 그리고 서울특별시 등에 널리 퍼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학문과 저술]
『완악편(玩樂編)』, 『규반록(窺班錄)』, 『경사증역(經史證易)』, 『좌역참증(左易參證)』, 『신증승평지(新增昇平志)』 등의 저술을 남겼다.
[묘소]
홍중징의 묘소는 아산시 배방읍 세교리 22-1번지에 있다. 묘 앞에는 홍봉한(洪鳳漢)이 짓고 1968년에 세운 신도비가 있다.
[상훈과 추모]
1765년(영조 41) 양효(良孝)의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제주특별자치시 용담1동 298-1 제주향교 대성전(大成殿) 뒤쪽에는 1982년 제주향교 유림들이 『청금록(靑衿錄)』을 작성하여 유생들의 요역을 면제해 주고 기아에 백성을 구휼한 공로를 기리기 위하여 세운 ‘사상홍공중징입청금안비(使相洪公重徵立靑衿案碑)’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