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09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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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孝子孟欽圭旌閭 |
영어공식명칭 | Monument for Filial Son Maeng Heum-gyu(Hyoja Maeng Heum-gyu Jeongnyeo) |
이칭/별칭 | 신창맹씨 정려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읍 고불로 563-9[중리 336-1]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서정수 |
건립 시기/일시 | 1830년 - 효자 맹흠규 명정이 내려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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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소재지 | 효자 맹흠규 정려 -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읍 중리 336-1 |
성격 | 정려 |
양식 | 겹처마 맞배지붕 |
정면 칸수 | 4칸 |
측면 칸수 | 1칸 |
[정의]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읍 중리에 있는 효자 맹흠규의 조선 후기 정려.
[개설]
맹흠규(孟欽圭)[1735~1811]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신창, 자는 유옥(幼玉), 호는 만옹(晩翁)이다. 신창맹씨 18대손으로 1765년 진사시에 급제하고 1805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사헌부 장령 등을 역임하였다. 효자 맹흠규 정려와 관련하여 맹흠규의 효행 관련 사항이 전해지는 기록이 확인되지 않는다. 1830년(순조 30)이라는 명정 연대에 관련해서도 신창맹씨 족보 외에 다른 자료는 없다. 명정 현판에도 시기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온양 일대에 신창맹씨가 대를 이어 살고 있었고, 1830년 즈음에도 맹흠규의 아들 맹봉순(孟鳳淳)과 손자 맹학술(孟鶴述)이 모두 사마시[생원과 진사를 선발하는 과거시험]에 입격하여 지역에서의 영향력이 컸을 것으로 보인다. 가문의 후손들과 지역 유림이 중심이 되어 명정을 요청한 끝에 허락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위치]
효자 맹흠규 정려가 있는 신창맹씨 정려각은 배방읍 중리 맹씨행단 진입로 입구 100여m 전의 지방도 623호선[고불로] 옆에 있는 신창맹씨비림(新昌孟氏碑林) 안쪽에 있으며, 금곡초등학교 체육관 부근 민가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형태]
효자 맹흠규 정려가 있는 신창맹씨 정려각은 정면 4칸, 측면 1칸의 규모로, 초익공 양식에 겹처마 맞배지붕을 올렸다. 장주 초석 위에 기둥을 올렸고 사면을 목재 홍살로 둘렀으며 좌우 측면에는 방풍판을 설치하였다. 정려 건물의 길이는 10.52m, 폭은 2.3m이고 높이는 4.5m이다. 내부에는 네 개의 명정 현판이 각 칸마다 걸려 있고 각각의 현판 아래로 비석이 보인다. 비석은 정면에서 바라보았을 때 정려 왼쪽부터 맹희도, 맹사성, 양주조씨, 맹흠규의 순서대로 세워져 있다.
신창맹씨 정려각 맨 오른쪽 칸에 있는 효자 맹흠규 정려의 명정 현판에는 ‘효자 증통훈대부 행사헌부집의 맹흠규지려(孝子贈通訓大夫行司憲府執義孟欽卞之閭)’라고 쓰여 있다. 비석은 방형의 대좌 위에 규형의 비신을 세우고 중앙 상단에 ‘효자리(孝子里)’라고 새겨져 있다. 그 아랫부분에는 여러 글씨가 작게 새겨져 있지만 마모가 심해 판독이 불가능하다.
[의의와 평가]
관련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맹흠규의 구체적인 효행 사실은 알 수 없으나 맹흠규도 맹희도와 맹사성 등 선조들을 본받아 지극한 효를 실천했기 때문에 정려가 내려졌을 것이라 생각된다. 효자 맹흠규 정려는 고려 말기부터 이어져 온 신창맹씨 집안의 효행이 조선 말기까지도 이어졌음을 알려 주는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