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20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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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의례/평생 의례와 세시 풍속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강성복 |
[정의]
충청남도 천안시에서 두레의 김매기를 마치고 칠석 무렵에 품값을 결산하며 함께 벌이는 마을 잔치.
[개설]
두레를 조직하여 논을 매던 1970년대 이전에는 김매기를 마치면 칠월 칠석이나 혹은 백중 무렵에 날을 잡아 두레를 총결산하는 행사를 가졌다. 이를 “두레 먹는다.”라고 한다. 두레 먹이는 두레를 구성한 마을 단위로 이루어졌다. 이날은 온 마을 사람들이 시원한 느티나무 아래나 공터에 모여서 품값을 결산한다. 소유한 논이 적어 일을 더 한 사람은 품값을 찾아가고, 반대로 넓은 땅을 소유한 농가에서는 품값을 냈다.
품삯을 제하고 남은 비용은 마을의 공동 기금으로 사용하는 것이 관례인데, 이 돈으로 통돼지를 잡는 등 푸짐하게 술과 음식을 준비하여 흥겹게 풍물놀이를 벌이며 마을 잔치를 벌였다. 마을에 따라서는 한 마을을 대표하고 상징하는 깃발인 농기(農旗)를 모시고 지내는 기고사(旗告祀)나 기세배(旗歲拜) 같은 의례가 수반되기도 한다. 두레 먹이는 김매기를 마친 뒤 호미를 씻는다는 의미를 지닌, 호남 지역의 ‘호미씻이’와 비교할 수 있다.
[절차]
두레 먹이는 과거 두레가 전승되던 시기에 천안 지역에서 보편적으로 행해졌던 마을 행사이자 칠석놀이의 성격을 띠고 있다.
흔히 두레의 품값은 한 마지기당 그 액수를 정하되, 토양 조건과 물의 형편에 따라 상답·중답·하답으로 구분한 논의 등급을 따져 차등을 두기도 하였다. 곧, 잡초가 많고 토질이 좋지 않아 김매기가 까다로운 하답은 조금 무겁게 매기고, 작업이 수월한 상답은 가볍게 품값을 정하는 것이다. 품값은 김매기를 마치고 나서 마을의 서기가 기록해 둔 장부에 따라 결산하였다.
천안시 동남구 풍세면 가송리 송정 마을에서는 김매기를 마치면 칠월 칠석에 두레 먹이를 했다. 이날 농토가 적은 소작농이나 가난한 집은 두레로 논을 맨 면적과 작업 일수를 계산하여 품값을 돌려받았고, 반대로 많은 토지를 소유한 지주나 부농은 품값을 냈다. 또한 두레에 일꾼을 내지 않은 농가나 빠진 사람은 두레 회의에서 정해 놓은 금액의 궐전(闕錢)이 부과되었다. 결산을 마친 뒤에는 남녀노소가 느티나무 아래에 있는 괴목정(槐木亭)에서 술과 음식을 준비하여 온종일 풍물을 치고 놀았다. 이를 위하여 미리 보리술을 담가 두고 인절미를 준비하였다. 그 밖에 참외를 비롯한 다양한 음식을 장만하여 함께 나누어 먹었다. 이날 일꾼을 내지 못한 집과 두레에 빠진 사람은 궐전을 내거나 자발적으로 술 한 동이를 빚어서 가져오기도 했다.
풍세면 용정리 한우물에서는 두레의 김매기가 마무리되면 두레 먹이를 겸하여 칠석놀이를 했다. 이를 위하여 부녀자들은 아침부터 음식을 장만하고, 청장년들은 풍물을 울리며 용정리 돈마루와 경계를 이루는 원안 고개로 갔다. 그러면 상대편 마을에서도 풍장을 치고 오는데, 중간에서 두 마을이 만나면 기세배를 했다. 기세배는 돈마루가 농기를 숙여 먼저 인사하면 한우물이 답례로 맞절을 했다. 이어서 두 마을이 한바탕 합굿[두 마을 이상의 풍물패가 함께 노는 굿]을 치면서 흥겹게 풍물놀이를 한 다음 한우물로 와서 술과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직산면 신갈리 갈미에서는 칠석과 백중 사이에 날을 잡아 두레 먹이를 했다. 품값을 결산한 뒤에는 농기를 공터에 세워 놓고 가장 나이가 많거나 으뜸가는 사람인 좌상(座上)이 술 한 잔을 올렸다. 두레의 김매기를 무사히 마친 만큼 마을을 상징하는 농기에 간단하게 예를 갖추고 마을 잔지에 들어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