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300832 |
---|---|
한자 | 多富洞戰鬪 |
영어의미역 | Battle of Dabu-dong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일수 |
성격 | 6·25 전쟁 |
---|---|
발생(시작)연도/일시 | 1950년 8월 |
종결연도/일시 | 1950년 9월 |
발생(시작)장소 |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 |
[정의]
6·25 전쟁 때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 일원에서 벌어진 전투.
[개설]
다부동은 다부원(多富院)이라고도 한다. 곧 조선시대 출장 관원을 위한 국영 숙박 시설인 원이 있었으며, 다부원은 칠곡 고평역(高平驛), 선산 연향역(延香驛), 인동 양원역(楊原驛)과 통했다. 다부동은 대구 북쪽으로부터 22㎞, 남북으로 ‘대구-안동’ 국도, ‘대구-상주’ 국도가 지나고 있고, 서로는 ‘왜관-다부’ 지방도로가 이어져 있는 교통의 요지이다. 하지만 다부동은 60여 가구 밖에 지나지 않는 작은 마을이었다.
[역사적 배경]
다부동은 대구 방어에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다부동을 중심으로 북서쪽에는 유학산이 북쪽에는 횡격실(橫隔室)을 이루고 있고, 동쪽에는 지역 내에서 가장 높은 가산(架山)[902m]이 있어 방어에 유리하였다. 반면 6·25전쟁 중 다부동 방어선이 돌파되면 10㎞ 남쪽의 도덕산(道德山)[660m] 일대까지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대구가 적 포병 사격의 사정권에 들어갈 수 있는 곳이기도 하였다.
[발단]
6·25 전쟁 중 국군 제1사단이 맡은 ‘328고지[석적면]-유학산[839m]-741고지[가산면 금화리]-902고지[가산, 산성]’를 연결하는 약 20㎞의 방어선은 최후의 보루였다. 국군 제1사단은 사단 좌측에서 ‘왜관-낙정리’[의성군 단밀면, 다부 북방 43㎞]를 방어하고 있던 미 제25사단이 8월 1일 경남 마산으로 이동하게 됨에 따라 이 지역을 맡아 제11·12·15연대 등 3개 연대로 북한군의 남하를 막는 지연전을 펼쳐 왔다. 8월 12일에 주저항선인 낙동강 방어선으로의 철수 명령에 따라 이날 밤 8시 다부동 일대의 주저항선[‘Y선’]으로 철수를 시작하였다. 사령부를 동명 초등학교에 두고 예하 3개 연대에 대해 방어 지대를 부여하였다.
[경과]
국군 제1사단은 이들 지형의 이점을 활용해 다부동 일대에 설정된 주저항선에서 대구를 공략하려는 북한군 3개 사단을 상대로 낙동강 방어 작전 중 치열한 혈전을 벌였다. 다부동 일원에서는 대구를 놓고 피아(彼我) 간에 유학산 전투, 328고지 전투, 837고지전투, 674고지 전투, 볼링장 전투, 가산산성 전투 등 낙동강 방어선 상 뿐 아니라 6·25 전쟁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 가운데서 837고지는 대구 사수의 최고 요충지였고, 유학산은 아홉 번, 328고지는 무려 열다섯 번이나 고지의 주인이 바뀔 정도로 피아간에 물러설 수 없는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국군 제1사단은 방어선을 지키기 위해 미 8군 사령부에 병력 증원을 요청하였고, 미 8군 사령부에서는 미 제27연대[마이켈리스 연대]를 신속히 지원하고, 이어서 미 제23연대를 추가 배치했으며, 육군본부도 1개 연대를 추가 배속시켰다. 이렇게 병력 증강을 지원받은 국군 제1사단은 낙동강 방어선 구축 이래 북한군의 ‘8월공세’와 ‘9월공세’를 방어하고 나아가 이를 격파함으로써 위기에 빠진 전황을 타개하였다.
[결과]
이후 국군 제1사단은 신녕(新寧) 서쪽 지역으로 이동하여 팔공산-가산 전투를 수행한 후 유엔군의 총반격 작전에 가담하였다. 특히 다부동 전투는 55일간이나 계속되었으며, 북한군 2만 4천여 명과 국군 1만여 명이 죽거나 다치는 인명 피해를 냈다. 그 결과 당시 투입된 북한군 3개 사단에 치명적인 패배를 안겨 주어 전세를 역전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6·25 전쟁사에서 다부동 일원에서 벌어진 전투는 국군의 위대한 전투로 기록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