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3018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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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遊鶴山- |
영어의미역 | Yuhaksanbindae Temple Site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경상북도 칠곡군 석적읍 성곡리 |
집필자 | 조은희 |
[정의]
경상북도 칠곡군 석적읍 성곡리에 전해오는 빈대 절 터와 관련된 이야기.
[개설]
이야기는 ‘쌀바위’ 설화, ‘미혈(米穴)’ 설화로 전국적으로 분포하는 이야기이다. 욕심을 너무 부리면 끝내 자연물에 의해 파괴된다는 우리 조상들의 소박한 가치관을 엿볼 수 있다. 칠곡군 석적읍 도개리의 안 골짜기 북쪽으로 우뚝 솟은 유학산을 중턱까지 올라가면 깎아지른 듯한 웅대한 바위 절벽이 정상까지 솟아 있다. 절벽 밑에서 고개를 들면 까마득히 보이는 정상이 위압감을 느끼게 한다. 높이가 50길이나 된다 하여 옛날부터 ‘쉰질바위’라고 불린다. 쉰질바위의 절벽이 시작되는 바로 밑에 절이 하나 있었는데, 지금은 그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지만 사람들은 이곳을 ‘빈대 절 터’라고 부르고 있다. 갈대와 잡초로 우거진 일대에는 지금도 깨어진 기왓장이 나와 이 전설을 뒷받침하여 주고 있다.
[채록/수집상황]
칠곡군지편찬위원회가 채록하여 1994년 발행된 『칠곡군지』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아주 오랜 옛날, 건립 연대도 사찰 이름도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쉰질바위 밑에는 조촐한 절이 있었다. 절의 건립 당시에는 스님도 제법 많아 법당에는 염불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불공을 드리는 신도들의 왕래로 조용한 가운데도 활기에 차 있었다.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시주하던 신도들도 차츰 줄고 그 많던 스님들도 하나 둘 절을 떠나 종국에는 노스님이 혼자서 절을 지키게 되었다. 이렇다 보니 노스님은 자신이 먹을 식량까지도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노스님은 매일같이 여러 마을을 다니며 시주를 받아야 했으므로 이런 나날이 계속되자 수행을 하고 도를 닦을 시간도 없게 되었다. 하루는 동냥에 지친 몸으로 절에 늦게 돌아온 노스님은 고단함을 참고 공양을 드리다가 깜빡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 부처님이 나타나서, “네 정성이 가히 불쌍하구나. 내일 아침 일어나 절 뒤편에 바위에 구멍이 난 곳을 살피면 쌀이 나올 것이니 한 사람의 연명에는 족할 것이다. 그 쌀로 너는 절을 지키고 수행에 정진하도록 하여라.”하고 일러 주는 것이었다. 깜짝 놀라 잠이 깬 노스님은 날이 밝기를 기다려 절 뒤편의 바위 절벽으로 가보니 과연 부처님이 꿈에서 이른 대로 절벽 밑에 뚫어져 있는 작은 구멍에서 쌀이 솔솔 흘러나오고 있었다. 기쁨과 감사의 마음으로 쌀을 받으니, 정확하게 한 사람 몫의 쌀이 나오고는 딱 멈추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어 노스님은 끼니때마다 마치 뒤주에서 쌀을 내어 밥을 짓듯 바위 구멍에 가서 쌀을 받아 매일의 식량을 해결하게 되었다. 이렇게 양식 문제가 해결되자, 스님은 시주를 받으러 마을에 나가는 것을 그만두고 부처님의 지시대로 수도에 전념하여 오랜 세월이 흘러갔다. 그러던 어느 날 조용하기만 했던 절에 세 사람의 신도가 불공을 드리기 위해 찾았고 며칠 동안 절에 묵게 되었다. 그런데 끼니때가 되자 노스님은 걱정이 생겼다. 바위 구멍에서 나오는 한 사람 몫의 쌀로는 네 사람의 밥을 지을 수 없기 때문에 저녁 지을 쌀을 받으러 간 노스님은 더 많은 쌀을 나오도록 하기 위해 손에 쥐고 있던 지팡이로 바위 구멍을 후비고 쌀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러자 기다리던 쌀이 아니라, 흰 빈대가 나오기 시작하였다. 갑자기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빈대는 그칠 줄 모르고 계속해서 나와 절을 침범하고 절 구석구석에 들끓게 되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불공이 중단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빈대 때문에 견딜 수가 없어 신도들도 절을 떠나고 말았다. 홀로 남은 노스님은 쌀 구멍에서 더 이상 쌀이 나오지 않아 굶주리기도 했지만, 더 큰 문제는 들끓는 빈대를 견딜 수가 없어 절에 불을 질러 모두 태워 버리고 절을 떠나 버렸다. 이런 사연 때문에 사람들은 이곳을 ‘빈대 절 터’라고 부른다.
[모티프 분석]
이야기의 모티프는 쌀이 나오는 구멍에 욕심이 생긴 노스님이 더 많은 쌀을 얻기 위해 구멍에 손을 대는 바람에 더 이상 쌀도 얻지 못하고 절까지 폐찰(廢札)당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