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4012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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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六月流頭 |
영어공식명칭 | Yuwol Yudu|The 15th Day of the 6th Lunar Month |
이칭/별칭 | 유두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의례/평생 의례와 세시 풍속 |
지역 | 충청남도 당진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강순희 |
[정의]
충청남도 당진에서 음력 6월 15일에 지내는 명절.
[개설]
유월 유두는 음력 6월 15일에 지내는 우리 민족 고유의 명절이다. 유두(流頭)는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는다.’라는 뜻을 가진 '동류수두목욕(東流水頭沐浴)'의 줄임말이다. 본격적인 더위를 맞는 유월에 더위를 시원하게 맞는다.'는 물맞이의 뜻을 담고 있다. 유두에 사람들은 음식을 차려서 산이나 강에 찾아가 머리를 감고 몸을 씻으면서 하루를 지낸다.
[연원 및 변천]
유두는 신라 때부터 전해 내려온 명절로 알려져 있다. 고려 명종 때의 학자 김극기(金克己)의 문집에 보면 “경주 풍속을 보면, 6월 보름에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아 불길한 것을 씻어 버린다. 그리고 계음(禊飮)을 유두연(流頭宴)이라 한다.”라는 내용이 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유두음(流頭飮)에 대해 “명종 15년(1185) 6월 계축일(癸丑日)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병인일에 시어사(侍御史) 두 사람이 환관 최동수(崔東秀)와 함께 광진사에 모여서 유두음을 하였다. 당시 우리나라 풍속에는 6월 15일에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음으로써 좋지 못한 일을 제거한다고 했으며, 이로 인해 모여서 술을 마셨는데 이것을 유두음이라고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조선 시대 정동유(鄭東愈)[1744~1808]는 『주영편(晝永編)』에서 우리나라 명절 중에 오직 유두만이 고유의 풍속이고, 그 밖의 것은 다 중국에서 절일이라고 일컫는 날이라고도 했다. 유두에 대한 기록은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둔촌 잡영(遁村雜詠)』, 『목은 선생 문집(牧隱先生文集)』 등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의 문집과 세시기에도 나타난다. 유두는 물과 관련이 깊은 명절이다. 물은 부정(不淨)을 씻는 것이어서 유두음을 '계음'이라며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였다. 유두에는 탁족 놀이도 즐기는데, 단순히 발을 씻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정화한다는 의미가 있다. 오늘날 유두는 거의 잊혀져 가는 명절이 되었다. 그래서 유두연은 점차 물맞이로 축소되고 다시 여름 바캉스로 변용되어 있다. 하지만 당진 농촌에서는 최근까지도 유두에 논과 밭에서 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절차]
유두에는 동쪽으로 흐르는 물가에서 머리를 감았다 하여 ‘동류수두목욕(東流水頭沐浴)’이라 했는데, 이것의 준말이 '유두(流頭)'가 되었다. 실제로 당진에서도 유두에 사람들이 동쪽으로 흐르는 계곡물을 찾아가 머리를 감고 하루를 쉬었다고 한다. 동쪽은 양기가 왕성한 곳이기 때문에 불길한 것을 씻어 낸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유두에는 강가나 계곡에 탁족(濯足), 피서, 천렵(川獵)을 갔다. 시원한 계곡에서 천렵으로 잡은 물고기를 끓여 먹으며 원기를 보충하고 발을 담그고 있다 보면 더위를 이길 수 있는 힘이 충전될 수 있음을 믿은 조상의 지혜였다. 또 유두에 밀로 만든 유두 국수[유두면]를 먹고 밀개떡과 밀수제비를 해서 나누어 먹기도 하고 밀가루에 호박을 썰어 넣고 밀전병을 부쳐 먹었으며, 먹기 전 집안의 성주신이나 조왕신에게 고사를 올리기도 하였다.
[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유두에 당진에서는 온 가족과 친지들이 음식을 가지고 맑은 시내 또는 산간 폭포를 찾아가 몸을 씻으며 하루를 보냈다. 그러면 상서롭지 못한 것을 쫓고 여름에 더위를 먹지 않는다고 믿었다. 이 무렵에는 새로운 과일이 나기 시작하므로 수박이나 참외와 같은 과일과 국수와 떡을 만들어 사당에 올리고 제사도 지냈다. 이를 유두 천신이라 하는데, 농가에서는 농신에게 제사를 지냈으며 벼, 콩, 조를 올렸다. 또한 떡을 해서 논의 물꼬 밑과 논둑 밑에 한 덩이씩 놓아두는데 물이 새지 말고 농사가 잘되라고 기원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