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354 |
---|---|
한자 | 睦叙欽神道碑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로 252-18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민정 |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 1571년 - 목서흠 출생 |
---|---|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 1652년 - 목서흠 사망 |
건립 시기/일시 | 1671년 - 목서흠 신도비 건립 |
문화재 지정 일시 | 2009년 6월 25일 - 충정공 목서흠 묘역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27호 지정 |
현 소재지 | 사천 목씨 묘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62 |
성격 | 신도비 |
관련 인물 | 목서흠(睦叙欽)|조경(趙絅)|이정영(李正英)|조위명(趙威明) |
높이 | 32㎝[옥개석]|218㎝[비신]|47㎝[비좌] |
너비 | 148㎝[옥개석]|88㎝[비신]|168㎝[비좌] |
두께 | 80㎝[옥개석]|23㎝[비신]|90㎝[비좌] |
소유자 | 사천 목씨 종친회 |
관리자 | 사천 목씨 종친회 |
문화재 지정 번호 | 서울특별시 기념물[충정공 목서흠 묘역] |
[정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의 사천 목씨 묘역에 있는 조선 후기의 문신 목서흠의 신도비.
[개설]
목서흠(睦叙欽)[1571~1652]의 본관은 사천(泗川)이고, 자는 순경(舜卿)이며 호는 매계(梅溪)이다. 기묘명현(己卯名賢) 중 하나인 현헌공(玄軒公) 목세칭(睦世秤)의 손자이다. 양구 현감(楊口縣監)·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 등을 거쳤으며,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이후 북관 선유 어사(北關宣諭御史)로 파견되었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공주까지 인조를 호종하였다. 이어 광주 목사(廣州牧使)·남양 부사(南陽府使)·부승지(副承旨) 등을 지냈고,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까지 인조를 호종하였다. 양양 부사(襄陽府使)·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를 거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으며,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1652년(효종 3)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건립 경위]
목서흠 신도비는 목서흠의 사망 이후 후손들이 목서흠을 추모하는 뜻으로 행적을 정리하여 1671년(현종 12)에 세웠다. 조경(趙絅)이 비문을 지었고 조경의 조카인 조위명(趙威明)이 글씨를 썼다. 비문을 짓고 19년이 지나도록 돌을 마련하여 세우지 못하였다가, 손자 목임형이 금화 현감으로 있을 때 비석을 마련하고 아들 목내선이 양주 목사로 있으면서 마침내 비문을 새겨서 세웠다. 이 때 자손의 사망·출생 및 혼인 관계를 추가 기록하였다.
[위치]
도봉구 방학동 방학 사거리에서 우이 계곡 방면으로 방학로를 경유하여 가다가 고갯길이 나오기 직전 도로 우측에 양효공 안맹담과 정의 공주 묘역이 있는데, 그 능선의 동쪽에 사천 목씨 묘역이 자리 잡고 있다. 사천 목씨 묘역 입구에 목서흠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형태]
형태는 팔작지붕 옥개형이다. 크기는 옥개석이 높이 32㎝, 너비 148㎝, 두께 80㎝이며, 비신(碑身)이 높이 218㎝, 너비 88㎝, 두께 23㎝이고, 비좌(碑座)가 높이 47㎝, 너비 168㎝, 두께 90㎝이다.
[금석문]
전액(篆額)은 ‘증 좌찬성 목공 신도비명(贈左贊成睦公神道碑銘)’이다. 조경이 글을 짓고 이정영(李正英)이 전액(篆額)을 쓰고, 조위명(趙威明)이 글자를 썼다. 이 비문은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에 수록되었다. 먼저 목서흠의 사망과 그 후손들이 조경 자신에게 글을 부탁한 일에 대해 쓰고, 이어 목서흠의 가계와 행적을 약술하고 마지막으로 공덕을 찬송하였다.
[현황]
현재 사천 목씨 묘역은 사천 목씨 종친회가 소유하고 있어, 목서흠 신도비 또한 그 관리 하에 있다. 2009년 6월 25일 충정공 목서흠 묘역(忠貞公睦叙欽墓域)이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27호로 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당대 명문장가와 명필들의 글씨를 확인할 수 있으며, 묘역과 그 안에 있는 석물들 또한 조선 후기의 묘제 및 석물 제작 양상을 알 수 있어 중요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