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3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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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碑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임혜경 |
[정의]
서울특별시 도봉구에 위치하거나 출토된 비.
[개설]
비(碑)는 어떤 사적(事蹟)을 후세에 오래도록 전하기 위해 나무·돌·쇠붙이 따위에 글을 새겨 세워 놓는 것을 가리킨다. 비에는 묘비[묘갈], 중수비, 신도비 등이 있다. 비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장의(葬儀)에서 세우던 풍비(豐碑)에서 유래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풍비란 하관할 때 쓰는 장구(葬具)로 큰 나무를 깎아 광(壙) 위아래에 세우고 그 끝에 줄을 연결하여 관을 서서히 내리는 도구이었다. 장례가 끝난 후 풍비에 죽은 이의 공덕을 기록하였던 데서 비가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비는 신(神)과 관계가 깊은 것으로 신이 다니는 길이라고 인식되어 이러한 의미에서 무덤에 세우는 비를 ‘신도비(神道碑)’라 이름 하였고, 묘혈(墓穴)[광중] 입구의 묘비는 지하인 명계(冥界)에서 지상으로 통하는 통로로 인식되었다.
풍비에 망인의 약력을 기록하기 시작한 이후 당대(唐代)에 묘제가 제정되면서 5품 이상의 고관은 묘에 이수(螭首)와 귀부(龜趺)를 갖춘 비를 세우게 하였고, 6품 이하의 관원 묘에는 원두 비신(圓頭碑身)에 방형 대좌(方形臺座)를 사용한 갈(碣)을 세우게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통일 신라 시대에 당의 영향으로 능묘 비(陵墓碑)가 세워지고 승려들의 경우에 탑비가 세워졌으며, 일반 귀족들은 주로 묘지석(墓誌石)을 사용하였다. 그 후 조선 시대에 정3품 이상은 신도비를 세우고, 그 이하는 묘갈을 세우게 하였다.
비는 석재를 방각형(方角形)으로 깎아 세운 것이고, 갈은 자연석의 한쪽 면만 깎아 위쪽이 둥그스름한 것으로, 재질에 따라 목비·석비·철비로 나뉘며 비문의 내용에 따라 묘비·탑비·능묘 비·신도비·사적비·유허비(遺墟碑)·기공비(紀功碑)·송덕비(頌德碑)·효자비·열녀비·사비(祠碑) 등으로 분류된다. 승려의 것은 탑비, 제왕의 것은 능비라고 하며, 묘비는 진한(秦漢) 시대에 비롯된 것으로 사자(死者)의 가계·행적 등을 돌에 새긴 것이다. 묘비 입구에 세운 묘갈·신도비 역시 묘비의 일종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시대 조상에 대한 효의 표현으로 크게 성행하였다.
유허비는 고적에 세운 것이며, 송덕비 또는 덕정비(德政碑)는 관련 인물의 공덕을 칭송하기 위해 궁실이나 관사에 세운 것이다. 흔히 불망비·선정비·시혜비(施惠碑)·추모비 등으로도 불린다. 기공비는 충신이나 열사의 공덕을 기념하기 위한 것으로 대개 공훈과 관련된 곳에 세웠다. 그 밖에 효자나 열부 등을 기리기 위해 국가에서 세우는 효자비·열부비(烈婦碑)·열녀비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비는 85년에 세워진 점제현 신사비(秥蟬縣神祠碑)이며, 다음으로 중국 지안[集安]에 있는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와 신라 진흥왕이 세운 진흥왕 순수비(眞興王巡狩碑) 등이 있다.
비는 비석을 받치는 대좌(臺座), 비문을 새긴 비신(碑身), 비신을 덮는 개석(蓋石) 또는 관석(冠石)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대좌는 거북 모양으로 조각한 귀부와 방형으로 깎은 방부(方趺) 두 가지가 있다. 귀부는 비문을 후세에 영구히 전하기 위해 수명 장존(壽命長存)을 상징하는 거북 모양으로 깎은 것으로 가장 오래된 형태는 태종무열왕릉비(太宗武烈王陵碑)에서 볼 수 있다. 방부는 아무런 문양도 넣지 않는 것이 보통이지만, 꽃잎을 새기거나 2~3단의 농대(壟臺) 위에 올린 경우도 있다.
비신은 대체로 긴 직육면체 형태인데 앞면을 비양(碑陽), 뒷면을 비음(碑陰)이라고 하며 여기에 비문을 새긴다. 비문에는 주인공의 행적뿐만 아니라 찬자(撰者)와 서자(書者), 입비(立碑) 과정과 참여한 사람의 이름 등 다양한 내용을 새긴다. 서울특별시 도봉구에 소재하거나 도봉구에서 출토된 대표적인 비는 묘비[묘갈], 중수비, 신도비로 분류된다.
[묘비]
1. 목진공 묘갈
목진공 묘갈(睦進恭墓碣)은 1428년에 건립되었으며, 목진공(睦進恭)의 8세손 목임일(睦林一)이 비문을 짓고 9세손 목천근(睦天根)이 글씨를 썼다. 높이 103㎝, 너비 50㎝, 두께 18㎝이며,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62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비문에 의하면 목진공은 고려 시대 사마시에 입격하였고, 조선이 건국되자 태조·태종·세종 삼조(三朝)에 걸쳐 관직을 역임하였다. 문장과 경학에 뛰어났으며, 내직으로 낭관과 판통례 겸 상서 소윤 및 예조·병조·형조·공조의 참의, 승정원 대언, 한성 부윤, 호조 참판을 지냈고 외직으로는 경기도와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다.
2. 양효공 안맹담 묘산기
양효공 안맹담 묘산기(良孝公安孟聃墓山記)는 1466년에 세워진 안맹담(安孟聃)[1415~?] 비의 음기(陰記)이다.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63-1번지 서울특별시 유형 문화재 제50호 양효공 안맹담과 정의 공주 묘역에 있었으나, 현재 일본 도쿄 대학에 소장되어 있다. 찬자는 정인지(鄭麟趾)이며, 서자는 안빈세(安貧世)이고, 각자(刻者)는 미상이다.
비문의 주인공인 안맹담은 죽산(竹山) 출신으로 자(字)는 덕수(德壽)이고, 시호는 양효(良孝)이다. 세종의 둘째 딸 정의 공주(貞懿公主)와 혼인하여 죽성군(竹城君)·연창군(延昌君)에 봉해졌다. 뒤에 연창위(延昌尉)로 개봉(改封)되었으며, 1455년에 원종공신(原從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초서(草書)에 능하였고 음률(音律)·약물(藥物)에도 밝았다고 한다. 음기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묘소의 위치와 방향, 비음을 기록하게 된 경위 등을 설명하고 있다.
3. 연산군 부인 신씨 지석
연산군 부인 신씨 지석(燕山君夫人愼氏誌石)은 1537년(중종 32)에 만들어졌다. 높이 232㎝, 너비 180㎝, 두께 20㎝로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77번지의 묘소에서 출토되어 현재 호암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5편으로 이루어진 직사각 판형의 백자(白瓷) 지석으로, 연산군의 부인인 거창 군부인(居昌郡夫人) 신씨(愼氏)[1476~1537]의 가계와 성품을 간략하게 기록하였다. 정사룡(鄭士龍)이 찬술하였으며, 글씨는 음각(陰刻)으로 새겼다.
거창 군부인 신씨는 1488년에 연산군의 세자빈(世子嬪)으로 책봉되어 연산군이 즉위함에 따라 왕비(王妃)가 되었지만,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연산군과 함께 폐위되었다. 연산군은 강화도(江華島) 교동(喬洞)으로 유배 가서 그곳에 묻혔는데, 1513년 신씨의 청으로 현재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으로 이장(移葬)하였다. 신씨의 묘 역시 같은 위치에 연산군의 묘와 나란히 있으며, 사적 제362호로 지정되어 있다.
4. 구일 묘표
구일 묘표(具鎰墓表)는 1702년에 세워졌으며,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에 위치하고 있다. 찬차는 박세당(朴世堂)[1629~1703]이며, 서자는 아들 구지정(具志禎)이다. 비문의 내용은 구일(具鎰)[1620~1695]의 가계와 관직 생활, 그의 효성과 후손들에 대한 기록으로 이루어져 있다. 구일은 능성(綾城) 출신으로 자는 중경(重卿)이다. 와서 별제(瓦署別提), 금부도사, 횡성·남평 현감, 사재감 첨정(司宰監僉正), 황해도 병마절도사, 경기 수군절도사, 금군별장(禁軍別將), 한성부 우윤, 포도대장 등을 역임하였다. 1678년 능평군(綾平君)으로 봉해졌고, 1680년 한성부 판윤 겸 총융사(摠戎使), 1688년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에 임명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대간의 탄핵을 받아 삭직(削職)당하고 송추에 은거하였다.
5. 이주진 묘표
이주진 묘표(李周鎭墓表)는 1760년에 건립되었다. 비신은 높이 130㎝, 너비 62㎝, 두께 30㎝로 이은(李溵)이 비문을 짓고 서명응(徐命膺)이 글씨를 썼다. 이주진(李周鎭)[1691~1749년]의 본관은 덕수(德水)이고, 자는 문보(文甫)이며, 호는 협옹(峽翁)이다. 1714년 사마시에 장원 급제하였고, 1725년 문과에 급제한 후 설서·검열·수찬·정언·이조 정랑 등을 지냈다. 1736년 통정대부에 봉해진 후 승지, 대사간, 이조 참의, 영변 부사, 전라 감사를 거쳐 도승지, 평안 감사, 이조 판서, 오위 도총관, 경기 감사 등을 역임하였고 1748년에 정헌대부가 되었다.
묘표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69-13번지에서 출토되었으며, 1980년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탁본이 서울 역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밖에도 조선 시대의 묘소가 밀집해 있는 서울 초안산 분묘군에 관료 최윤언(崔潤彦), 한종건(韓宗健), 김세보(金世輔), 이필간(李弼幹), 내시 승극철(承克哲)의 묘표를 비롯하여 약 150기의 묘표와 13기의 묘갈이 산재해 있다.
[중수비]
승가굴 중수비(僧加窟重修碑)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우이동 북한산 승가굴에 위치하며, 승가굴의 연혁 및 중수 과정을 기록한 비이다. 1106년에 건립되었으며 찬자와 각자는 미상이다. 승가굴은 신라 시대 승려 수태(秀珆)에 의해 건립되었으며, 중국에서 관음보살의 화신으로 신앙되는 승가 대사(僧伽大師)의 석상을 모신 굴원(窟院)이다. 고려의 역대 국왕들이 남경(南京)에 행차할 때 이곳을 방문하여 예불하였는데, 특히 선종(宣宗)과 숙종(肅宗)이 많은 물자를 희사하여 중수하도록 하였다고 전한다. 비의 마멸이 심하여 판독이 거의 불가능하지만, 비문 내용이 『동문선(東文選)』에 전한다. 고려 중기에 서승(書僧)으로 유명한 탄연(坦然)이 비문의 글씨를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도비]
1. 양효공 안맹담 신도비
양효공 안맹담 신도비(良孝公安孟聃神道碑)는 세종의 부마인 안맹담의 신도비로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에 있는 양효공 안맹담과 정의 공주 묘역 아래에 세워져 있다. 거대한 귀부 위에 대리석 이수를 갖춘 통비(通碑)로 비신은 높이 187㎝, 너비 104㎝, 두께 26㎝이다. 1466년에 건립되었으며, 비문의 찬자는 영중추 하동 부원군 정인지(鄭麟趾)이고, 전액과 글씨는 안맹담의 아들 안빈세(安貧世)가 썼다. 비면의 마멸이 심하여 판독은 불가능하며, 묘역과 함께 서울특별시 유형 문화재 제50호로 지정되었다.
2. 한치례 신도비
한치례 신도비(韓致禮神道碑)는 1500년에 건립되었으며,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64번지 한치례 묘(韓致禮墓)의 입구에 있다. 이수와 비신이 하나의 돌로 제작되었으며, 비좌에는 복련(覆蓮)·안상(眼象)·초문(草紋)이 조각되어 있다. 한치례(韓致禮)[1441~1499]는 본관이 청주(淸州)이며, 자는 자절(子節)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도정·병조 참지·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1469년에 성종이 즉위하자 외숙으로서 중용되어 동지중추부사, 병조 참판, 이조·호조·병조·공조 판서 등 요직을 두루 거치고 사은 부사(謝恩副使), 성절사(聖節使)로서 두 차례 명나라에 다녀왔다. 1471년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에 책록되었고 서릉군(西陵君)에 봉해졌으며, 1499년에는 서릉 부원군(西陵府院君)으로 진봉되었다. 시호는 장간(莊簡)이다.
3. 이인 신도비
이인 신도비(李仁神道碑)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산81-1번지의 이인 묘 왼쪽에 위치하여 있다. 이수·복련·안상으로 장식된 비좌를 갖추고 있으며, 비신은 높이 88㎝, 너비 40㎝, 두께 15㎝이다. 1509년에 건립되었으며 첨지중추부사 남곤(南袞)이 비문을 쓰고 해서체로 유명하였던 승정원 주서(注書) 김희수(金希壽)가 글씨를 썼다.
이인(李仁)은 세종의 아홉 번째 아들 영해군(寧海君) 이당(李塘)의 아들로 1474년 영춘군(永春君)에 봉해졌고 사옹원 제조(司饔院提調)를 지냈다. 연산군 대 아들 강녕부정(江寧副正) 이기(李祺)의 내폐(內嬖) 사건으로 남해(南海)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 중종이 즉위하면서 복직된 뒤 정국 원종공신(靖國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이인 신도비는 서울특별시 유형 문화재 제106호로 지정된 전주 이씨 영해군파 묘역 안에 있다.
4. 목서흠 신도비
목서흠 신도비(睦敍欽神道碑)는 1671년에 건립된 목서흠(睦敍欽)[1571~1652]의 신도비이다. 비신은 높이 218㎝, 너비 85㎝, 두께 22㎝이다.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62번지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27호로 지정된 충정공 목서흠 묘역(忠貞公睦叙欽墓域)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비문의 찬자는 조경(趙絅)이며 조경의 조카인 조위명(趙威明)이 글씨를 썼다. 목서흠은 자가 순경(舜卿)이고, 호는 매계(梅溪)이며, 본관은 사천(泗川)이다. 1597년 음서(蔭敍)로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한 이후 내시교관과 양구 현감을 지냈다.
1610년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 정랑, 지제교, 좌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인조를 호종하여 남한산성으로 들어갔으며, 그 후 양양 부사·개성부 유수·참찬관·좌승지·우승지·예조 참판·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좌찬성으로 추증되었고, 1675년에 충정(忠貞)이라는 시호를 하사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