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18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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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致道 |
영어공식명칭 | Park Chido |
이칭/별칭 | 학계(學季),검암(黔巖)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홍창우 |
출생 시기/일시 | 1642년 - 박치도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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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62년 - 박치도 진사 입격 |
활동 시기/일시 | 1668년 - 박치도 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71년 - 박치도 가주서(假注書)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680년 - 박치도 지평(持平), 정언(正言) 등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682년 - 박치도 부수찬(副修撰), 장령(掌令) 등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683년 - 박치도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등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684년 - 박치도 승지(承旨) 임명 후 파직 |
활동 시기/일시 | 1686년 - 박치도 승지(承旨) 재임명 |
몰년 시기/일시 | 1697년 - 박치도 사망 |
출생지 | 광주광역시 광산구 하남동 |
사당|배향지 | 진천사(眞泉祠) - 광주광역시 광산구 진곡동 가작마을 |
성격 | 문관 |
성별 | 남 |
본관 | 순천(順天) |
대표 관직 | 홍문관교리|사헌부집의|승지 |
[정의]
조선 후기 광주 지역 출신으로 홍문관교리. 사헌부집의, 승지 등을 지낸 문신.
[가계]
박치도(朴致道)[1642~1697]의 본관은 순천(順天)이며, 자는 학계(學季), 호는 검암(黔巖)이다. 할아버지는 박언감(朴彦瑊), 아버지는 성균생원(成均生員) 박충정(朴忠挺)이다. 박치도의 부인은 이수겸(李守謙)의 딸 성주이씨(星州李氏)이다.
[활동 사항]
박치도는 1642년(인조 20) 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하남동에서 태어났으며, 1662년(현종 3) 진사에 입격하였고, 6년이 뒤인 1668년(현종 9) 별시에서 병과 7위[전체 11위]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박치도에 관한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은 1671년(현종 12)에 가주서(假注書)[승정원의 대리 임시관직]에 임명되었다는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의 기사이다. 이후 박치도는 1680년에 지평(持平), 정언(正言), 1682년에 부수찬(副修撰), 장령(掌令), 1683년에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1686년에 승지(承旨) 등의 관직에 보임되어 다양한 업무를 수행하였다.
『광주읍지(光州邑誌)』와 『호남인물지(湖南人物志)』에는 박치도가 조선 후기 남인(南人) 계열의 영수인 윤휴(尹鑴)[1617~1680]를 배척하였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는 박치도와 교유한 인물 가운데 송시열(宋時烈), 김수항(金壽恒)을 비롯하여 서인(西人)계 인사들이 다수 있는 것과 관련 지을 수 있다. 특히 숙종의 후궁인 소의장씨(昭儀張氏)의 소생을 원자(元子)로 삼으려 한 이른바 ‘원자정호(元子定號)’ 문제로 인해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권력을 장악한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을 계기로 박치도 역시 조정에서 멀어진 것으로 보인다.
[학문과 저술]
박치도는 우암(尤庵) 송시열[1607~1689], 노봉(老峯) 민정중(閔鼎重)[1628~1692], 문곡(文谷) 김수항[1629~1689] 등과 교유하였다. 『검암집(黔巖集)』은 일제강점기인 1920년에 후손 박노준(朴魯準)과 박노인(朴魯寅) 등이 간행한 박치도의 문집이다. 전체 4권 2책의 목활자본으로, 송시열의 후손 송철헌(宋哲憲)의 서문과 오준선(吳駿善)의 발문 및 편찬을 주도한 박노인의 추지(追識)가 확인된다. 17세기 중·후반 호남 사림(士林)의 문학상은 물론이고 당시의 정치적 동향이나 순천박씨의 역할을 확인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상훈과 추모]
광주광역시 광산구 진곡동 가작마을에 있던 진천사(眞泉祠)는 박치도를 비롯하여, 문숙공(文肅公) 박석명(朴錫命), 칠졸재(漆拙齋) 박창우(朴昌禹), 석촌(石村) 박충정(朴忠挺), 시암(時庵) 박영림(朴榮林), 우헌(寓軒) 박상현(朴尙玄), 안촌(安村) 박광후(朴光後), 손재(遜齋) 박광일(朴光一), 소은(素隱) 박중회(朴重繪), 담락재(湛樂齋) 민사하(閔師夏) 등을 배향하였던 사우이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는데 그 이후 복원되지 못하고 지금은 옛터와 진천사유허비(眞泉祠遺墟碑)만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