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18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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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忠挺 |
영어공식명칭 | Park Chungjeong |
이칭/별칭 | 수부(秀夫),석촌(石村)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바른 |
출생 시기/일시 | 1608년 - 박충정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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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27년 - 박충정 사마시 입격 |
몰년 시기/일시 | 1657년 - 박충정 사망 |
출생지 | 광주광역시 광산구 흑석동 |
성격 | 문인 |
성별 | 남 |
본관 | 순천(順天) |
[정의]
조선 후기 전라도 광주 출신의 문인.
[가계]
박충정(朴忠挺)[1608~1657]의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수부(秀夫), 호는 석촌(石村)이다. 증조할아버지는 박의손(朴義孫), 아버지는 충의위(忠義衛) 박언감(朴彦瑊)이다. 부인은 신필(申滭)의 딸 고령신씨(高靈申氏)이며, 2남 3녀를 낳았다. 아들은 박민도(朴敏道), 박치도(朴致道)이다.
[활동 사항]
박충정은 1608년(선조 41) 전라도 광주 흑석리(黑石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의젓하고 문재(文才)가 있어 글을 지으면 자주 회자(膾炙)되었다. 1623년(인조 1)에 향시(鄕試)에 입격하였고, 1627년에 사마시(司馬試)에서 생원, 진사에 모두 입격하였다. 박충정은 효성이 지극하여, 아버지가 오랫동안 병을 앓자 밤낮으로 곁을 떠나지 않고 간병하였다. 아버지가 강도에게 상해를 입고 사망하였는데, 강도를 잡아 원수를 갚았으나 애통하여 병이 들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으며, 이후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경학을 공부하며 후진 양성에 매진하였다. 1657년(효종 8)에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박충정의 저술로는 1920년 후손인 노인(魯寅) 등이 편집하여 간행한 『석촌유고(石村遺稿)』가 있다. 연세대학교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묘소]
박충정의 묘소는 『석촌유고(石村遺稿)』 행장에, 광주 흑석리 선산(先山)에 장사를 지냈고, 후에 어등산(魚登山)으로 옮겨 부인과 부장(附葬)하였다고 전한다.
[상훈과 추모]
박충정은 전라도 광주에 있었던 진천사(眞泉祠)에 배향되었다. 진천사는 1762년 진호(晉湖)의 서쪽과 정광산(淨光山) 북쪽에 건립되었는데, 박충정, 박상현(朴尙玄), 박광후(朴光後), 박광일(朴光一), 박중회(朴重繪) 등 5인을 배향하였다. 이후 1823년(순조 23)에 중건되면서 박석명(朴錫命), 박치도(朴致道)가 배향되었다.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기 직전에 박창우(朴昌禹), 박영림(朴榮林) 등이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