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19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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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光後 |
영어공식명칭 | Park Kwanghoo |
이칭/별칭 | 사술(士述),안촌(安村),외성당(畏省堂)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바른 |
출생 시기/일시 | 1637년 3월 3일 - 박광후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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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66년 - 박광후 사마시 입격 |
몰년 시기/일시 | 1678년 11월 15일 - 박광후 사망 |
출생지 | 아산리(鵝山里) - 광주광역시 광산구 도천동 |
거주|이주지 | 안청리(安淸里) - 광주광역시 광산구 안청동 |
묘소|단소 | 진곡리(晉谷里) - 광주광역시 광산구 하남동 |
묘소|단소 | 정광산(凈光山) - 광주광역시 광산구 고룡동 |
사당|배향지 | 진천사 - 광주광역시 광산구 진곡동 |
성격 | 문인 |
성별 | 남 |
본관 | 순천(順天) |
[정의]
조선 후기 광주 출신의 문인.
[가계]
박광후(朴光後)[1637~1678]의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사술(士述), 호는 안촌(安村) 또는 외성당(畏省堂)이다. 증조할아버지는 박운정(朴雲挺)이며 할아버지는 진사 박창우(朴昌禹)이다. 아버지는 충의위(忠義衛) 박천용(朴天用)이고, 어머니는 부호군(副護軍) 남이령(南以寧)의 딸 의령남씨(宜寧南氏)이다. 부인은 승의랑(承議郞) 홍정(洪艇)의 딸 남양홍씨(南陽洪氏)로, 1남 6녀를 낳았으며 아들은 박중회(朴重繪)이다.
[활동 사항]
박광후는 1637년(인조 15) 3월 3일 전라도 광주 아산리(鵝山里)[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도천동]에서 태어났다. 1666년(현종 7)에 사마시에 입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갔다. 박광후는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으로, 송시열이 "은산(銀山)과 철벽(鐵壁)이 될 사람"이라고 박광후를 칭찬하였다. 여러 문인들과 교유하였으며, 1675년(숙종 1) 5월 송시열의 신원(伸冤)을 위해 통문(通文)을 돌렸다. 1668년 겨울에 새로 급제한 민암(閔黯)이 성혼(成渾)과 이이(李珥)를 모욕하였다는 이유로 문묘 배알(拜謁)을 저지한 일이 있었는데, 이 일이 문제가 되어 1675년 박광오(朴光五), 유익서(柳益瑞), 김진우(金震羽), 유응수(柳應壽) 등과 형벌을 받았다.
1677년 사촌 박광일(朴光一)과 함께 장기(長鬐)에 유배된 송시열을 방문하여 5일간 머무르다 돌아오기도 하였다. 이때 송시열과 나눈 대담이 『송자대전』, 「박광일록(朴光一錄)」에 전한다. 1678년 11월 15일에 42세로 전라도 광주 안청리(安淸里)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박광후가 죽은 후 김수항(金壽恒)이 송시열에게 보낸 편지에 “사술[박광후]이 죽으니 남주(南州)에 다시 사람이 없다."라고 하며 안타까워하였다.
[학문과 저술]
1861년에 기정진(奇正鎭)이 박광후의 유고를 정리한 『안촌집(安村集)』이 있으며 기정진은 박광후의 아들 박중회의 유고인 『소은집(素隱集)』을 함께 정리하여 이 둘을 합쳐 『안촌세고(安村世稿)』로 엮어 서문을 썼으나 한동안 간행이 이루어지지 못하다가 1908년 후손 박현동(朴賢東)이 활자로 인행(印行)하였다. 국립중앙도서관, 규장각, 성균관대학교 등에 소장되어 있다.
[묘소]
박광후는 전라도 광주 진곡리(晉谷里)[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하남동]에 장사 지냈으며, 후에 정광산(凈光山)[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고룡동]에 이장하였다.
[상훈과 추모]
박광후는 전라도 광주에 있었던 진천사(眞泉祠)에 배향되었다. 진천사는 할아버지 박창우와 아들 박중회를 비롯해 박상현, 박석명(朴錫命), 박충정(朴忠挺), 박영림(朴榮林), 박치도(朴致道), 박광일, 민사하(閔師夏) 등을 배향하였는데, 1868년 서원 철폐령에 따라 철폐되었다. 지금은 광주광역시 광산구 진곡동에 진천사 유허비(眞泉詞遺墟碑)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