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17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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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西倉洞寺洞-忠州朴氏世居地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광주광역시 서구 서창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정호 |
[정의]
광주광역시 서구 서창동에 있는 충주 박씨 세거지.
[개설]
충청도의 대전에 살던 충주박씨 박지흥(朴智興)[1411~1489]이 광주에 살던 정지(鄭地)[1347~1391] 장군의 아들 정경(鄭耕)의 딸에게 장가왔다. 그 처가는 어디인지 알 수 없으나, 1462년 정씨부인이 죽자 당시 세하동 절골에 살던 이천서씨 서종하(徐宗夏)의 딸에게 다시 장가갔다. 그러므로 충주박씨가 절골로 들어간 것은 정확히 1462년이라 할 수 있다.
[자연환경]
오늘날 서구 서창동에 속하는 이 동네는 남쪽으로 송악산[169m], 북동쪽으로 한생이산[159.4m] 사이의 골짜기로 옛날 성제암이라는 절이 있어서 절골이라 부르던 곳이다. 절골에서 북서쪽으로 영산강 건너에 광주공항이 보인다. 조선 중기 이후 방하동면에 속한 사동촌은 1914년 서창리에 속하고, 1963년 서창면이 되었다. 이어 서창출장소를 거쳐 광산구에 속하였다가 서구가 신설되면서 서구로 편입되었다. 절골은 서창동 1통이다.
[연원]
충주박씨 박지흥은 56세 때인 1467년 첫아들 박정(朴楨)[1467~1498]을 낳고, 환갑을 지난 64살에 둘째아들 박상(朴祥)[1474~1530]을 낳고, 2년 뒤 셋째아들 박우(朴祐)[1476~1547]를 낳은 뒤 79세에 세상을 떠났다. 당시 큰아들의 나이는 23세였고, 둘째아들 박상은 15살, 박우는 13살로 큰형인 박정이 두 동생을 가르쳤다. 박상은 첫 외가인 하동정씨 집안 정화의 누이에게 시집가고 형이 32살의 나이로 요절하자 28살의 나이로 가장이 되었다. 박상은 27살이 되던 1521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갔다. 41세에 담양부사로 있으면서 순창군수 김정과 함께 신씨복위 상소를 올린 죄로 오림역에 유배되었다. 1517년 순천부사로 있을 때 어머니 서씨가 죽어 모친상 중이던 1519년 을묘사화의 화를 면하여 나주목사를 지내었다. 박상의 동생 박우도 1515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박우는 대사성과 전주부윤을 지내었다. 박우의 둘째아들 박순(朴淳)[1523~1589]이 영의정을 지내고 전라도 사람들의 관계 진출에 큰 공을 세웠다. 박상은 문장가로 이름이 난 석천 임억령(林億齡)[1496~1568]을 가르치는 등 호남시단의 원조로 불린다. 박상의 둘째아들 박민중(朴敏中)이 소지면 손머리[광산구 소촌]로 분가하여 그 후손 중에서 용하 박용철(朴龍喆)[1904~1938]이 나왔다.
[현황]
1936년 간행된 총독부의 『조선의 취락』을 보면 54집 가운데 39집이 충주박씨로 기록하고 있다. 『광주동연혁지』 발간 당시인 1990년 절골에는 47가구 가운데 25가구가 충주박씨였다. 광주역사민속박물관의 『광주동족마을』 발간 시점인 2003년에는 57가구 가운데 47가구를 충주박씨로 집계하고 있다. 광주광역시에 거주하는 충주박씨는 2,287명으로 광주광역시에 거주하는 전체 박씨 12만 7428명의 17.9%이다. 그렇더라도 이 집안에서 3대, 4대 국회의원 박흥규(朴興奎), 6대, 7대, 13대 국회의원 박종태(朴鍾泰)를 내었으며, 전남대학교 총장 박하욱도 이 집안 사람이다.
[유적]
광주광역시 광산구 소촌동에 박상, 박순을 모신 송호영당[1728년]이 있다. 절골에는 눌재 박상의 묘와 신도비[1631년], 입향조를 모신 제각인 봉산재[1857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