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1003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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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押梁郡 |
영어공식명칭 | Amnyang-gun |
이칭/별칭 | 압독군(押督郡)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
지역 | 경상북도 경산시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방용철 |
[정의]
삼국 시대 경상북도 경산시 일대에 설치되었던 신라의 지방 행정 구역.
[개설]
압량군은 본래 압량국(押梁國)[혹은 압독국(押督國)]이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신라 지미왕(祗味王)[재위 112~134]이 정벌하였으며, 이후 압량군[혹은 압독군(押督郡)]을 설치하였다.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 757년(경덕왕 16) 장산군(獐山郡)으로 개칭하였다.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 동 지역과 남산면, 압량읍 및 대구광역시 동구 일부 지역을 관할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압량군은 사로국(斯盧國)이 신라(新羅)로 성장하고 발전하는 과정에서 효율적인 지방 통치를 실현하기 위해 설치한 행정 구역이다.
[관련 기록]
『삼국사기』 권34 지리지1 신라조에는 “지미왕 때 압량소국[혹 압독소국]을 쳐 빼앗아 군을 설치하였다. 경덕왕이 [장산군으로]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장산군(章山郡)으로 영현(領縣)은 셋이다. 해안현(解顔縣)은 본래 치성화현(雉省火縣)[한편 미리(美里)라고도 이른다]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도 그대로 따른다. 여량현(餘糧縣)은 본래 마진량현(麻[미(彌)라고도 쓴다]珍良縣)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으며, 지금의 구사부곡(仇史部曲)이다. 자인현(慈仁縣)은 본래 노사화현(奴斯火縣)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도 그대로 따른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때의 군(郡)과 관련하여 『삼국사기』 권32 제사지1 중사(中祀)조에는 오악(五岳)을 설명하면서 “중앙의 부악(父岳)은 공산(公山)이라고도 하는데, 압독군(押督郡)이다.”라는 구절이 보인다. 또한 『삼국유사(三國遺事)』 의해편 「원효불기(元曉不羈)」에는 원효의 출생 배경을 설명하는 중 “원효는 처음에 압량군(押梁郡) 남쪽, 지금[고려]의 장산군(章山郡)인데, 불지촌(佛地村) 북쪽 밤나무골 사라수 아래에서 태어났다”라는 기사가 남아 있다.
한편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에는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 23년(102) 8월에 “실직(悉直)[강원도 삼척시 비정]·압독(押督)의 두 국왕이 항복해 왔다”는 기록이 있어 지리지 내용과 차이를 보인다.
또한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에는 파사이사금 27년(106) “정월에 [파사이사금이] 압독에 행차하여 가난하고 곤궁한(貧窮) 이들을 구제했다. 3월에 압독에서 돌아왔다.”는 행적이 남아있다. 일성이사금(逸聖尼師今) 13년(146) 10월에 “압독이 반란을 일으키니 군대를 보내 토벌하고, 남은 무리들은 남쪽 지역으로 옮겼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삼국사기』 권32 악지(樂志)에는 “백실(白實)은 압량군의 음악이다”라는 향악(鄕樂)에 관련된 짧은 기사가 남아 있다.
[내용]
『삼국사기』 지리지에 따르면 2세기 초반 지미왕이 정벌하여 신라에 병합하고 압량군[혹은 압독군]을 설치했다. 다만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 23년(102) 8월에 압독국이 항복해 왔다는 기사도 보여 신라에 편입된 정확한 시점은 알기 어렵다. 『삼국사기』에는 압독이 신라에 편입된 정황 이외에도 왕이 행차하여 구휼한 기록, 반란이 일어나 토벌한 기록, 장산성(獐山城)[지금의 용산산성(龍山山城)으로 비정]에서 백제군과 전투한 기록 등이 풍부하게 남아있다. 신라 초기부터 경산 지역을 정치·군사적 측면에서 중요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경산 지역의 중요성과는 별개로 실제 압량군이 설치된 시기는 6세기 이후 신라 시대로 추정된다. 고고학적 발굴 성과에 따르면 4~5세기 무렵까지도 경산 지역에 독립적인 세력이 존재하였고, 신라에 군현이 나타나는 것은 6세기 중·후반 이후이기 때문이다.
[변천]
압량군은 757년(경덕왕 16)에 장산군(獐山郡)으로 개칭되었다.
[의의와 평가]
압량군은 삼한시대 사로국의 주변 소국 병합과 신라 초기의 지방 지배 방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평가된다.